영원할 것 같았던

마음속의 봄은 그렇게 지나가버렸다

누가 볼 새도 없이 저 혼자 피고 져버린 저 갈대처럼

 

작아져버린 봄과 함께

고요함으로 치장한 호수 속에

마음에 묵혀두었던 응어리를 놓고 간다

환난도 미움도 아픔도 고뇌도

내 모든 추악한 죄도 함께 두고 간다

 

그동안은, 그랬다

 

삶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라고

상처에 딱지가 앉아 아물기도 전에 날 할퀼 것이라고

우는 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누구도 내게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꿈이라고 현실이 아니라고

차마 고개를 흔들고 싶다고

눈을 감아버리고 싶다고

온몸으로 나를 지우고 싶다고

 

상황이 감각이 의지가 책임이

나를 뾰족하게 만들었다

도망치는 발걸음을 좀 더 빠르게 만들었다

하지만 등속원운동으로 움직여도 아무 소용없었다

그것은 제자리걸음과 마찬가지였다

 

이제야, 알았다

 

이제

조금씩 속도를 좇아가고자 한다

나를 받아주지 않는 사막 같은 현실 속에서

홀로 오아시스를 만들며 살아가고자 한다

나를 보는 사람들에게 안녕, 이라고 수줍게 인사하고자 한다

 

서른 다섯의 나를 그렇게 채찍질하고자 한다

 

 

 

(글-직접 작성, 사진-효돌양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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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원이었다. 아침에 관리인이 물을 주고 있었다. 이파리와 줄기에 가득 머금은 물이 반짝였다.

  나는 낯선 땅에 와 있었지만 너와 함께라 낯설지 않았다. 너는 웃으며 연방 사진을 찍었고, 나도 내 마음에 멋진 풍경을 새겼다. 풍경에 비해 별로 멋지지 않은 나를 기꺼이 안아준 네가 옆에 있다 생각하니 뿌듯하고 애틋해졌다. 그리고 네가 참 기특하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만은 그랬던 것 같다. 우리를 싸고 펼쳐질 아름답지만 고된 미래 같은 것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감정과 감정이 오고가며 생길지도 모르는 즐겁지만 힘들고 슬픈 시간 같은 것도 마찬가지였다.

  너와 내가 백년가약을 맺었지만 우리가 서로 진정한 교감을 하기 위해서 건너야 할 강은 멀고도 깊을 텐데. 한 시간 남짓 걸려 행한 그 찬란한 의식 끝에 남는 것은 단조로운 삶들인데. 오롯이 버텨내야 할 많은 대화와 행동이 운명처럼 우리 앞에 있을 텐데.

  그 때 그 순간 스쳐가는 많은 생각을 뒤로 하고, 너는 계속 사진을 찍고 나는 사진을 마음에 담아두었다.

 

 

  신혼여행 모습을 사진으로나 보게 될 때, 주변이 정리되고 한가로이 책을 보면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너와 나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너의 삶이 나의 삶이 되고 나의 삶이 너의 삶이 되는 경지라면 좋겠지. 딱딱하고 서먹한 분위기가 부들부들해질 수 있다면 그땐 우리의 관계가 좀 나아질 수 있겠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것 하나만큼은 알 것 같았다.

  우리의 사랑은, 관계는 이제부터라는 것. 결실이 아니라 이제 막 파종을 했을 따름이라는 것.

 

  (글-직접 작성, 사진-효돌양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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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편지를 보낼게요

당신에게 드리는 이 편지는 눈 속에서 반짝거려

매서운 날씨라도 멈출 수 없는 걸요

진실한 메시지란 춥다고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요

 

이 편지는

잘 지내요? 라고 시작해서

잘 지내세요, 라고 끝나지만

어느 말 하나라도 당신에게 닿지 않는 걸아요

나를 바라봐주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으니까요

 

하지만 어떡해요,

내겐 아직도 당신이 최고인데,

백화점에서만 파는 고급 마블쉬폰케익보다도

당신은 날 설레게 하는데,

 

나, 구질구질하게 굴지 않을래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시간을 돌릴 수 있는지,

당신 마음을 구매할 수 있는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하지 않을래요

 

그래도 내 마음은 내꺼잖아요

우리 동네 마음 수리 아저씨에게 날 맡기기 전에

난, 이 편지를 보내며 홍역처럼 아플래요

마지막으로

 

말해질 수 없는 많은 말을 접어두고

이렇게 당신 집에 쿵, 소리만 남긴 채

편지를 보낼게요

 

 

(글-직접 작성, 사진-효돌양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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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이 들어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을 나와 광야에서 40년간 방황할 때

하나님께서 그날분의 만나와 메추라기를 뿌려주셨지

이스라엘 사람들은 막막함 속에서 절망했지만

그날분의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매일을 살아갔지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느끼며 살아갔지

 

나도 그런 거 같아

 

매일 앞이 보이지 않는 광야에서

주님이 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렇게 하루하루 지내다보니 여기까지 왔어

구름기둥 불기둥을 의지하며 이 자리까지 왔어

 

이제 그 도상(途上)에 너도 함께네

 

여전히 나는 못나고 어리석지만

주님을 바라보며 당신과 함께 걸어가면

그날분의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겠지?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주셔서

우리의 더위와 추위를 견디게 해 주시겠지?

 

힘들지만 주님을 바라보며 서로 사랑하자

 

우리 잘 하리라 믿어

 

- 결혼식을 앞둔 10월 4일 퇴근길에

 

 

 

(글-직접 작성, 사진-효돌양 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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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쯤이면 나도 정말 어른이 되어 넓은 마음으로 품을 수 있을까

아프고 미운 마음 용서할 수 없던 그 감정들을 내가 먼저 감싸줄 수 있을까

(* 노래 - 하비누아주, '언제쯤이면')

 

 

  푹푹 찌는 여름, 시끄러운 게 싫어서 담양으로 갔다. 담양 대나무 숲에서 이 노래 가사를 흥얼거렸다. 높다랗게 솟아오른 대나무가 만들어낸 울창한 숲을 보면서 내 마음은 한결 따뜻해지고 포근해졌다. 그리고 너그러워졌다. 비록 서울로 가면 다 잊고 또 쪼그라들겠지만 그런 것은 그 때 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동행(同行)이 안고 있는 고민을 듣고는, 그의 행간에 주목한다. 그의 눈과 입김, 말투와 행간의 몸짓을 보며 나도 그가 되었다. 그래, 그도 나처럼 외로운 사람이었지, 생각한다. 이야기가 얼추 정리된 후 나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걱정 마, 다 잘 될 거야, 라고 말했다. 그런 위로의 말을 건네며, 사실은 그보다 문제가 더 많은 나를 위무한다.  그리고는 언제까지고 우리, 대나무 숲에 있을 것처럼 앉아있었다.

 

  이렇게 초록색 길을 걷다보면 괜히 녹차라떼나 녹차 프라푸치노 같은 게 먹고 싶어지더라고.

 

  내가 한 실없는 말에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일어나서 또 다른 초록으로 향했다.

 

 

(글-직접 작성, 사진-효돌양 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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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물었다

혹시 어디 가세요?

 

멋대로 상상했다

조모임하러 학교 갑니다

일하러 사무실 들어갑니다

남자친구 만나러 가요

야간알바 끝나고 집에 들어가요

그렇게 저마다의 사정으로 걷고 또 걸어간다

 

평소에는 나도 일정 부자

물밀 듯 몰아치는 할 일을 감당하기 버거웠지만

오늘만은 모든 것을 잠시 제쳐두고

거리와 사람들을 보고 또 본다

 

저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걸어간다

뜨끈해진 머리와 자신만의 주관을 안고

저마다의 목적지로 걸어간다

 

걸어가는 사람 어딘가에 내 모습도 있었다

현실의 불안정함을 온몸으로 관통하고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끙끙 앓으면서

그저 겉으로는 무심한 듯 이어폰을 끼는 내 모습

 

십 년 전에 거리를 걸을 때도

지금 같은 거리를 걸어도

계속 맞닥뜨리는 어려운 문제와 해결되지 않는 고민

 

한여름의 거리에는

무거운 마음과 가벼운 발걸음의 괴리가 함유된

나와 사람들의 흔적이 묻어있다

 

 

 

(글-직접 작성, 사진-www.paperda.com '사진방'에 있는 사진 중 '그냥물고기' 님의 작품을 가져왔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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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내 앞에는 커다란 호수와 두툼한 눈밭

건너편에서 너는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데

닿을 수 없는 우리 사이엔 더 이상 무엇도 닿지 않았다

 

운명은 우리를 거슬러 더 멀리 가라고 했다

눈물 같은 게 땅에 떨어졌지만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내 말은 바람소리 탓에 들리지 않았고

내 눈빛은 눈부신 햇살 탓에 옅어지고 있었다

 

전쟁 같은 세상 속에 서 있는 우리,

그 사이를 좁히려면 얼마나 많은 기다림과 고비를 넘어야 할까

나는 너 있는 자리에 갈 수 있을까

그 자리에 너는 저기 저 나무처럼 언제까지고 서 있을 수 있을까

 

놓아지지 않는 네 손을 놓아버리고

운명은 내 눈을 멀게 하고

상황은 네 입을 막아버렸지만

그래도 기억은 자유로워

멀어지는 네 모습을 부단히 네 마음속에 담는다

 

네가 묻어있는 저기 저 나무와 호수, 갈매기에게 내 마음도 듬뿍 묻힌다

너와 내가 그들 속에서만이라도 함께하길 바라며

이제 나도 세상 속에 떠내려간다

너를 더 이상 알지 못한 채, 네가 없는 세상 속으로

 

 

(글-직접 작성, 사진-효돌양 님, 2010년 홋카이도 토야 호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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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반가워!

너 지금 혼자니? 나도 여기 혼자 왔는데.

지금 무얼 보고 있는 건지, 애들이 안 놀아주는 건지, 그런 건 묻지 않을게.

중요한 거는 너와 내가 이렇게 마주하고 있다는 거니까.

 

나는 나대로, 또 너는 너대로 여기 이렇게 살아왔지만

때로 옳은 길로 가다가, 중간에 다른 길로 새기도 하고 그렇겠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계속 이렇게 흘러가겠지. 

 

그저 난

어딘가를 무던히 응시하는 네 모습과

그저 혼자라도 가는 다리를 꼿꼿이 들고 서있어야 하는 삶이

나랑 너무 닮아서, 그래서 한 번 말을 걸어봤어.

 

네가 안개 속에서 나는 법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처럼

나도 앞이 보이지 않는 좁은 길을 의연하게 걸어갈게.

 

다음에 널 만날 때는, 서로 좀 더 편안하기를.

 

 

(글-직접 작성, 사진-효돌양 님, 2013년 비가 내리는 어느 날 화성 궁평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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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쪽이 맞는 걸

 

왼쪽으로 가야 할까, 오른쪽으로 가야 할까

직진을 해야 할까, 유턴을 해야 할까

여기서 쉬어야 할까, 아니면 계속 걸어가야 할까

 

다시 너를 만날까, 아직 기다릴

얘기를 할까, 미소만 보낼까

이만 보낼까, 아니면 조금 더 붙잡아야 하는 걸까

 

수 많은 선배들이 걸어간 길을 그저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나보다 가진 것이 훨씬 많은 그분들을 선망하며

그에 비해 이룬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음을 책망하며

 

이런 못난 나를 지탱해줄, 확고한 이정표 하나 필요한

세찬 비 내리는 어느 늦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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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 봐, 여기 잘 왔지? 답답한 속 트이게 하는 건 바다가 최고라니까,' 하며 너는 말했다. 일요증보판 신문 같은 넉넉한 웃음은 덤이었다. 덕분에 나도 수채화 같은 미소가 지어졌다. 

  쉼 없이 활기찬 파도 속으로 내 못난 마음을 밀어넣기로 했다.

  좁아터진 마음, 시기심, 분노 등을 비단으로 곱게 포장하여 군청색 바다 속으로 발송했다.

  바다는 풍덩, 하며 내 마음을 받아주었다.

 

  우리 유치하지만 서로의 소원을 빛나는 바다 속에 풀어놓자.

  그래, 좋아.

 

  좀 더 온유해지자, 겸손해지자, 의연해지자고 생각하며 기도하였다. 그리고는 바다가 주는 맑은 공기를 하루 한 번 꼭 먹어야 하는 내복약처럼 모조리 털어넣었다.

  너도 나처럼 너의 소원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날 보며 계속 진지하게 웃어주었다. 그 웃음이 좋았다.

 

  '우리 서로 같은 소원이었길 빌어,' 하며 너는 말했다.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너와 나는 한참을 백사장에 서 있었다.

 

 

 

(글-직접 작성, 사진-효돌양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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