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블로 사태와 관련해 다른 곳에 쓴 글을 옮깁니다.)

조현오 청장이 생각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차명 계좌가 있다고 공공연하게 말했죠.
청문회에서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게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차명 계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돌아가신 분의 성품이나 살아오신 길을 볼 때 없으리라고 믿지만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주의할 것은, 무언가가 없다는 걸 증명하는 건, 있다는 걸 증명하는 것에 비해 훨씬 힘들다는 겁니다.)

아무튼 조 청장이나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노무현 차명 계좌의 존재는 99% 진실일 수도 있습니다.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이 이명박의 숨겨둔 재산의 존재를 99% 믿는 것처럼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믿는 것은 자유죠. 하지만 그 믿음이 '진실 추구'라는 미명 하에 권력이 되어도 될까요?

노무현 대통령의 비리를, 누군가의 마음 속에선 실재하는 그 비리를 조사한다는 이름 아래
수사 결과가 노출되었습니다. 마치 밝혀진 사실인 것처럼 떠들어졌습니다. 그리고 한 분이 목숨을 버렸죠.
설사 비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되어서는 절대 안 되는 겁니다.
피의자의 권리나 인간으로서의 존중되어야 할 것들이 그런 식으로 무시되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들이 '진실'을 알고 있다고 (믿는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타블로 사태도 마찬가지입니다.
타진요나 상진세가 권력기관은 아닙니다.
하지만 엄청난 댓글들과 여론 형성으로 사실상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타블로 및 그의 가족들은 그들이 감당해야 할 것 이상의 피해를 보았습니다.
과연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이래도 되는 것일까요?

 여전히 타블로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럴 만한 개연성도 상당합니다.
제가 볼 때 타블로는 뻥이 꽤 센 성향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신이 한 조그만 일들을 부풀려서
대단한 일인양 말한 부분들도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 대해서 비판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매도해도 되는 걸까요?
"난 진실을 알고 있고, 넌 거짓말쟁이야. 그러니까 넌 무슨 일을 당해도 싸."
이런 게 옳은 걸까요?

타진요나 상진세의 모든 분들이 위와 같은 태도를 갖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 타블로를 의심한 모든 분들이 사과를 하거나 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저도 황우석 사태 때 황우석을 믿었었습니다. 그럴 만한 상황이었죠.
이번에도 타블로를 의심할 만한 정황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의심한 분들이 모두 사과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문제는 "난 진실을 알고 있고, 넌 거짓말쟁이야. 그러니까 넌 무슨 일을 당해도 싸."라는 식의 태도를 가진 사람입니다.
대표적으로 '왓비컴즈' 같은 사람이 있겠죠.
이런 사람들은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합니다. 분명 책임을 져야 합니다.

비록 조현오도 책임지지 않는 세상이지만 왓비컴즈라도 책임져야 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타블로의 방송에서의 '뻥'들을 언급하시는 분들께 말씀드립니다.
그게 문제의 핵심일까요? 무슨 격투게임에서처럼 타블로가 뻥쟁이면
왓비컴즈가 위너가 되고, 타블로는 루저가 되는 걸까요?

사실 이 게임엔 위너가 없습니다. 모두 다 루저입니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10. 10. 16:14
내 정치적 또는 문화적 성향이란 건 결국 성격에 의해 형성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성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말이다. 실제로 미국에선 그런 연구도 있었던 걸로 알고 있다. 공화당 지지자냐 민주당 지지자냐 하는 건 성격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성격을 측정하는 도구 중 가장 많이 연구되고 있는 것이 Big 5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MBTI 등이 더 잘 알려져 있어 심리학 전공자들만 아는 도구이긴 하지만 학계에선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이다. 다섯 가지 특질의 정도로 성격을 측정하는 것인데 그 다섯 가지를 줄여서 OCEAN이라고 한다. Openness, Conscientiousness, Extroversion, Agreeableness, Neuroticism의 앞글자를 딴 것인데, 각각의 뜻은 개방성, 꼼꼼함, 외향성, 동조성, 신경증 정도 되겠다. 이 다섯 특질에 대해 측정해 절대 점수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전체 집단 중 몇 %에 속하는지, 즉 백분위로 나타낸다. N 점수가 상위 10%라면 감정이 매우 불안한 사람이라는 거다. 반대로 하위 10%라면 매우 안정적인 사람이라고 하겠다.


Big 5에서 내게 가장 두드러졌던 특질은 Agreeableness였다. 2004년이니까 상당히 오래 전이긴 하지만 당시 A가 하위 3%를 찍었다. 즉 지극히 Diagreeble 하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남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 정도를 넘어서 반대까지 할 것 같다. 내 정치적 성향은 이 낮은 A에 근거하는 게 아닐까 싶다. 즉 주류의 의견에 반대하면서 반보수적인 성향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런데 최근 왜 보수적이 되는 걸까? 그건 아마도 세상이 아닌 주위 의견의 주류가 별로 보수적이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즉 주위의 의견에 반대하면서 또 역으로 가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노무현 생전에 노무현에 대해 극도로 비판적이었는데 아버지가 노빠였던 것도 한 원인이었다.

근데 이렇게 생각해보니 젋었을 때 운동권에 몸담았다가 지금은 뉴라이트에 가있는 사람들이 좀 이해가 간다. 그들도 A가 극도로 낮은 사람들이 아닐까? 그래서 사회에 반발해서 운동권에 몸담았다가, 다시 운동권에 반발해서 뉴라이트가 돼버린 것이다. 그리고 내 기억이 맞다면 나이가 들수록 A가 조금씩 올라가는데, 이제는 A가 어느 정도 높아져서 다시 현재 자기가 소속된 곳의 의견에 반발하지 않게 된 것이다. 헉. 그렇다면 나도 보수우익이 될 수 있다는 건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주의해서 나쁠 건 없지. 무슨 일에서건 균형잡힌 시각이 중요한 것 같다. 책도 너무 치우치게 읽지 말고 말이다. 중용, 중용.

난 문화적으로는 그닥 진보적이거나 개방적이지 않은데 중간쯤인 O에 기인하는 게 아닐까싶다. O가 높은 사람들이 새로운 예술이나 문화를 잘 받아들인다. 예전에 학생 복장에 대해 썼듯이 난 의복에 대해 보수적이고 포스트모던 예술을 싫어한다. 근데 굳이 싫어할 것까진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최근에 들었다.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싫어할 필요는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 불과 얼마 전에 쓴 글이긴 하지만 패션에 대해서도 좀 생각이 바뀌었다. 올림픽 선수들의 자유로운 패션이 꽤 멋져 보였던 게 한 원인이다. 흠, 난 스포츠를 넘 좋아해서 말이지. ^^

하지만 정치적인 관점을 떠나 스포츠에 대한 진보의 주장은 감정적으로 동조하기가 너무 힘들다. 예로 들어 강준만은(아, 이 사람은 진보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80년대에 관해 쓴 그의 책에서 전두환이 국민을 우민화하기 위해 만든 거라며 프로야구를 끊임없이 비판했다. 설사 탄생이 그렇다 하더라도 프로야구가 주는 즐거움은 평가할 가치가 있지 않을까? 스포츠와 관련된 비판적 담론에서 종종 느끼는 건 그 사람들이 조금 더 스포츠 팬이 아닌 것 같다는 것이다. 스포츠 팬이라면 비판하는 와중에도 애정이 은근 드러날 텐데 그런 게 없다. 나의 순수한 즐거움을 외면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상한다.

예전에 언론고시 스터디를 하면서 차와 관련해서도 비슷한 얘기가 나왔던 적이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자동차 및 자동차 산업에 대해 비판하고 있었다. 사실상 자동차의 범람이 인간의 삶을 더 황폐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점에 대해선 동의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멋진 스포츠카 같은 건 한 번 타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한 친구가 비판했다. 그런 건 자연스런 욕망이 아니며 잘못된 것이라고 말이다.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스피드에 대한 욕망이 꼭 자본주의 사회의 왜곡된 욕망에만 근거하는 것일까? 바람을 가르며 빠르게 뛰어내려갈 때의 쾌감 같은 것의 확장 아닐까? 스포츠카를 타고 싶다는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것들의 가치를 고려할 때 그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비판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욕망 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은 다른 얘기 아닌가?

에궁. 무슨 얘기를 하다 여기까지 왔지? 원래는 내 성격을 얘기하려고 했는데 말이지. 다시 한 번 Big 5를 측정해보고 싶다. 이번에는 어떻게 나올까? 그때보다는 A가 높아지겠지?

*추신: 스킨을 또 바꿔봤다. 이전 게 그닥 멋있어 보이지 않아서 말이지.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3. 7.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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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달을 딴 한국 선수들 - 한국은 동계올림픽 역대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다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이 끝났다. 한국은 역대 동계올림픽 사상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다. 메달을 기대하지 않았던 빙속에서 단거리, 장거리에 걸쳐 금메달을 따는 등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이라이트는 세계신기록으로 당당히 최고의 자리에 오른 김연아였다. 그저 보기만 했던 나도 가슴이 떨릴 정도인데 경기에 나서는 선수의 긴장감은 어느 정도였을까? 그런 긴장감과 압박감을 이겨내고 완벽하고 아름다운 연기를 보여준 김연아 선수에게 아무리 찬사를 보내도 아깝지 않을 것 같다.

나는 김연아에 열광했고, 이번 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들이 나선 경기들을 열중해서 보았다. 이런 내가 이상한가? 여기에 딴죽을 걸 친구도 있을 것이다. 나는 한때 상당히 강하게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스포츠 민족주의에 별 거부감이 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지 않은가? 내가 변한 건가? 그렇다, 변했다. 하지만 그 변화의 주된 이유는 민족주의에 대한 호감이 늘어서이기보다는 민족주의 비판 담론의 문제점을 발견해서이다.

기존의 민족주의 담론은 이제 촌스러워졌다. 자체적인 진단이라기보다는 외부의 담론을 그대로 받아들였을 뿐이어서 초점도 어긋난다. 지금은 2010년인데 PD가 NL 비판하는 식이다. 틀에 갇혀 변화하는 모습을 포착해내지 못 한다. 어떤 점이 그런지 살펴보자.

민족주의가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개개 국민들을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그 민족의 사업을 수행하는 '국가'에 '동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2차대전의 총력전이 바로 그런 식으로 이루어졌다. 우리는 매우 가까운 역사를 통해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무차별적인 동원이 이루어지고, 또 잔인한 폭력이 수행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민족주의를 억눌러야 이런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 기존의 담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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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 - 종교나 민족이나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과연 그런가? 문제의 핵심이 민족인가? 그렇지 않다. 문제의 핵심은 '동원'이다. 민족은 사람들을 쉽게 동원하기 위한 강력한 명분 중 하나일 뿐이다. 역사적으로는 폭력적인 사업의 동원 명분으로 종교가 더 자주 이용되었다. 도덕, 가문, 명예 등도 명분이 될 수 있다. 자본주의 시대엔 돈도 명분이다. 즉 문제는 어떠한 명분이든 개인을 무차별적으로 동원하는 매개체가 되면 위험할 수 있다. 굳이 민족만이 문제는 아닌 것이다.

오늘 올림픽에서 한국을 응원하는 사람들을 보자. 한국이 이겼다고 기뻐하고 함께 열광한다. 열광하는 군중들 중 아직 군대 안 간 청년한테 물어보자. "스포츠 잘 하는 한국이 자랑스럽지요? 이 자랑스런 국가를 위해 군대에 가는 게 기쁘지 않나요?" 아마 미쳤냐는 소리 들을 것이다. 그들 중 아무나 붙잡고 조건없이 미국영주권 줄 테니 바로 한국을 떠나야 한다고 말해보자. '얼씨구나'하는 사람들 많을 것이다. 과연 여기 어디에서 국가에 대한 동원이 이루어지는가? 그저 응원에 대한 자발적 동원이 있을 뿐이다.

민족에 대한 지나친 경계는 일본으로부터 수입된 것이다. 그들은 민족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킨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전쟁은 엄밀히 말해 민족의 이름으로 수행된 것이 아니라 '반공'의 이름으로 수행된 것이었다. 물론 독재 정권 하에서 민족은 동원의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의 민족은 저항의 구심점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통일의 명분이기도 하다. 일본의 민족 담론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민족주의 비판 담론의 또다른 한 축은 민족허구론이다. 이는 아마도 서구에서 들어온 개념이 아닐까 예상한다. 민족은 혈연을 근거로 하는데 순혈을 유지한 민족 집단은 없다. 또 민족이란 근대에 들어와 탄생한 개념이다. 따라서 민족은 허구적인 개념, 즉 거짓이라는 것이다. 나는 민족이 순혈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민족이 근대에 들어와 탄생한 개념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게 민족이 허구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민족은 물론 역사적이고 인공적인 개념이다. 하지만 모든 인간 공동체가 다 그렇다. 국가, 회사, 마을, 친족 모두 그렇다. 심지어 가족도 인공적이다. 세계에는 부부와 그 자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가족 관계도 존재한다. 아마 극단적으로 말하면 자연적이고 명백한 인간관계는 모자 또는 모녀뿐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공적인 공동체나 인간관계들이 다 허구가 되는가? 인공적이라는 것, 지역에 따라 다르다는 것, 역사적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 어떤 것이 허구라는 근거가 되지는 못 한다. 그렇게 따지면 물리학의 '원자'조차도 허구가 될 것이다. 원자는 한때 분리될 수 없는 입자였으나 지금은 쿼크라는 더 작은 입자로 쪼개질 수 있는 입자로 여겨지고 있다. 상당수의 물리학 개념은 과학자들이 문제를 명확히 하기 위해 만든 도구적 개념이어서 역사적인 변천을 겪지만 그 유용성이 살아있는 한 폐기되지 않는다. 사실 실체적 의미라는 관점에서 판단하면 '중력'에 비해 '민족'은 엄청 실질적이라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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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의 구조 - 원자의 개념은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

민족은 현실에 존재하는 개념이다. 민족주의 비판자들은 순혈주의를 비판하며 마치 순혈주의의 허구성이 드러나면 민족에 대한 믿음이 와르르 무너질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지만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한민족이 순혈이 아니라는 건 다 아는 얘기다. 족보를 중시하는 우리나라에서 시조를 물어보면 중국에서 왔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내 성도 그렇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여진족이었을 가능성이 꽤 있다. 그래서 뭐 어떻단 말인가? 이런, 우린 한족도 아니고 여진족도 아니고 한민족도 아니네. 이렇게라도 생각한단 말인가? 피가 섞여온 역사와 상관없이 현재 이 땅에서 비교적 동질적인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집단으로서의 민족이라는 개념은 그대로 남는다. 한민족의 피가 순수하지 않다는 것이 이땅에 살고 있는 사람이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장해가 되진 않는다. 나는 오히려 민족주의 비판자들이 순혈주의에 집착한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이다.

민족이 근대에 생겨났다는 주장도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민족 국가는 확실히 근대에 성립되었고, 그 민족 국가를 구성하는 개념으로서의 민족도 근대에 성립된 것은 맞다. 하지만 광의의 민족은 그전부터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중앙집권적인 통일국가를 형성하면서 민족 개념이 생겼을 가능성이 높다. 앙드레 슈미드는 그의 저서 <제국 그 사이의 한국 1895-1919>에서 18세기 초 청과 조선의 영토 분쟁을 예로 들면서 비록 근대적 형태는 아닐지라도 국경이나 민족에 대한 개념이 한반도에 존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는 모든 전근대 사회가 마치 똑같았던 것처럼 오해하면 안 되며, 모든 '민족(nation)' 개념이 모든 사회에서 똑같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우리는 민족이 근대에 이르러서야 탄생했다는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한반도의 역사적 특수성을 고려해 재고해봐야할 것이다.

제국 그 사이의 한국 1895-1919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앙드레 슈미드 (휴머니스트,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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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또는 서구의 민족주의 담론을 그대로 받아들여 우리나라의 민족주의를 비판만 하는 것은 또다른 문명근대화론일 수 있다. 민족주의를 비판만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민족을 강조하는 것은 '촌스러운 것', '후진국스러운 것'이라는 의식이 깔려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민족의 긍정적 측면이나 한국적 특수성, 또는 최근의 비동원적인 민족주의, 즉 대중주의로의 변화를 읽지 못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들은 지나치게 서구의 눈, 또는 수십 년 전의 눈으로 민족주의를 읽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민족 개념을 깡그리 없애야 한다는 파괴적인 비판보다는 건설적인 비판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순혈주의 비판은 매우 필요하다. 한국은 여전히 외국인혐오증이 심한 사회고, 다문화가정에 대한 배려도 부족하다. 결혼이주여성과 혼혈자녀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혈통적 다양성을 강조하는 새로운 민족 개념이 필요하다. 그리고 민족 개념이 국가에 의해 악용될 가능성이 상존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에 대한 경계는 늦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통일의 중요한 명분, 국가에 저항하는 명분으로서의 민족이라는 한국적 특수성, 타국가에 비해 매우 동질적인 집단 등을 고려할 때 민족은 폐기해야 할 것도 폐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만고불변의 혈연집단으로서의 민족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이 땅에 살고 있는 역동적인 공동체로서의 민족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그 실체와 유용성을 존중하며 이왕이면 그 힘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하길 바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올림픽 기사들을 살펴본다. 이제는 예전과 달리 국가니 민족이니 국민들이니 하는 말 없이 개인적 성취에 자연스럽게 기뻐하는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을 보며 국가 동원의 민족주의 색채가 젊은이들의 의식 속에서 많이 사라졌다는 걸 느끼며 흐뭇해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들이 나와 같은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개인적 성취에 대해 나라는 개인도 기쁨을 느낀다. 그로 인해 내가 기뻐할 수 있다면, 또 사람들이 기뻐할 수 있다면 좋지 않은가?

스포츠 민족주의 운운하며 젠체하느니 차라리 소리높여 한국팀과 선수들을 응원하고 축하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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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를 확신하는 김연아의 모습 - 그냥 마지막 사진으로 쓰고 싶어서... ^^;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3. 1. 14:53
어느 학문 분야에 있는 사람이 가장 실증주의적일까 묻는다면 대개는 자연과학도나 공학도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인문학은 실증주의와는 거리가 좀 있으니까. 하지만 가장 실증주의적인 부류는 자연과학의 방법으로 인문학의 대상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한다. 바로 심리학자들, 인지과학자들 말이다. 이공계 사람들은 낭만적인 데가 있어서 모든 것에 철저히 실증주의적이지가 않다. 천문학자들이나 물리학자들이 낭만적으로 그려지는 건 익숙하고, 공학도들은 기계에 대해서만 냉철할 뿐 인간과 관련해선 그리 철저해 보이지 않는다. 반면 인간에 대해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심리학자(주로 인지 분야)와 인지과학자들이야말로 인간을 가장 냉철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아닌가 싶다.

인지심리학 랩에 있을 때 나는 동료들과 종종 근원적인 논쟁을 벌이곤 했다. 그중 가장 치열했던 것은 뇌를 연구함으로써 인간 정신의 비밀을 풀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현재 학계의 주류적 입장은 그렇다는 것이다. 인지심리학이 심리학의 주류를 점하고, 다시 신경과학이 인지심리학의 주류를 점해, 인지신경과학이 마음에 대한 학문의 최정점에 서있는 지금, 대부분의 학자는 뇌에 관한 연구가 인간 정신의 비밀을 풀어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나는 이것이 지나친 환원주의라고 생각했다. 물리학에서조차 미시 세계와 거시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은 다르다. 화학에서 수소와 산소의 성질을 안다고 해서 물의 성질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뇌의 신경구조를 이해한다고 해서 인간 정신의 법칙들을 모두 설명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나의 논점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물질과 정신이 별개라는 이원론자인 것은 아니다. 나는 일원론자이고, 당연히 뇌가 없이는 정신도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뇌에 관한 설명이 곧 정신에 관한 설명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나의 생각은 랩 친구들과의 논쟁에서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들은 일원론을 받아들인다면 당연히 환원주의를 취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여기서 일원론은 당연히 유물론이기에 우리의 정신의 기반이 되는 뇌에 관한 연구가 곧 정신에 관한 연구라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이 하도 강견하고 나는 혼자였기 때문에 비록 내 생각을 꺾진 않았지만 내 생각에 대한 자신감이 꺾이긴 했다. 또 학계에서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학자는 없는 것 같아서 환원주의에 대한 내 우려는 기우인 걸까, 심지어 내가 인문학을 한 사람이라 환원주의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의심도 들었다.

그런데 최근에, 난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학계에도 존재한다는 걸 알았다. <뇌과학의 함정>(원제: Out of Our Heads)이란 책을 발견하고 말이다. 저자는 UC 버클리의 철학과 조교수이며 철학자이지 인지과학자이자 신경과학자인 알바 노에(Alva Noё)이다. 나는 내 생각이 진지하게 학계에서 논의되는 주제라는 걸 알고서 무척 기뻤다. 그래, 편견을 가진 건 내가 아니라 그들이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뇌 과학의 함정: 인간에 관한 가장 위험한 착각에 대하여
카테고리 과학
지은이 알바 노에 (갤리온, 2009년)
상세보기

최근 뇌과학의 열풍 속에서 많은 책들이 출간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이 책은 매우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 뇌과학을 비판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요즘, 아니 예전부터 뇌과학의 가장 큰 목표는 '의식의 신경 상관물(Neural Correlates of Consciousness)'을 찾는 것이다. 즉 뇌의 어떤 부분이 의식을 일으키는가 하는 것이다. 낸시 캔위셔(Nancy Kanwisher)가 얼굴을 지각하는 특정 영역(FFA:face fusiform area)을 발견한 이후 뇌는 특정한 기능을 담당하는 여러 모듈들의 집합체로 여겨지고 있다. 아니, 그 역사는 허블과 비셀이 고양이 뇌를 이용해 특정한 선분을 감지하는 시각세포를 발견한 데까지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신경과학자들은 의식을 일으키는 특정 영역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비록 그 영역이 시각 세포처럼 특정한 세포이거나 FFA처럼 특정한 부위가 아니라, 여러 부위들의 연합체일지라도, 어쨌든 의식이 뇌 안에 특정한 영역에 의해 발생한다는 가정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이 책은 그 가정을 비판하는 데서 출발한다.

저자는 의식이란 우리 뇌와 몸과 세상과의 역동적인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뇌만 연구해서는 의식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가장 많이 연구돼온 시각을 예로 들어보자. 주류 신경과학자들은 시각에 대해서 뇌가 일종의 퍼즐을 맞추는 것이라고 본다. 즉 외부로부터 입력된 상당히 제한된 정보를 뇌가 그럴듯한 정보로 처리하고 구성한 후 의식이 보게 되는 것이 시각이라는 것이다. 즉 '본다'는 것은 뇌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각을 연구하려면 우리 머릿속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저자는 뇌가 그렇게 복잡하게 보는 것을 구성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부족한 정보는 몸과 세상의 도움을 받아 충분히 메꿀 수 있다. 우리는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움직여서 사물의 다른 곳을 볼 수 있다.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세상은 자신의 다른 모습을 끊임 없이 일관적으로 보여준다. 우리가 '보는 것'은 뇌가 구성한 영상이 아니라 '세상'이고, 시각은 우리의 뇌와 몸과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다양한 사례를 들어 시각 및 여러 인지 기능을 뇌 속으로 집어넣으려는 주류적 입장들을 비판한다. '부주의맹'같은 것은 입력 정보의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현상으로 여겨져 왔지만, 저자는 세상이 거기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 뇌가 굳이 모든 정보를 기억하고 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대학원 시절 배웠던 익숙한 현상들이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웠다. 그리고 한 번은 내가 교수님과 논쟁을 했던 사항-꿈과 현실을 다른가-도 논의가 된다. 나나 저자의 주장은 물론 꿈과 현실은 다르다는 것이다.

저자는 궁극적으로 공격하려는 것은 주류 신경과학에 깔려있는 '통 속의 뇌' 은유이다. 즉 우리의 정신 현상은 모두 뇌 속에서 일어나며, 뇌만으로도 정신을 일으키는 데 충분하므로, 적절한 양분을 공급해 살아있게만 해준다면 '통 속의 뇌'만으로도 우리 정신은 유지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것에 대해 단호히 비판한다. 정신 현상은 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뇌와 몸과 세상의 상호작용으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런 가정의 뿌리는 데카르트까지 올라간다고 본다. 일찍이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 과정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악마가 만들어낸 가짜일지도 모른다고 가정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하고 생각하는 우리 자신은 존재한다. 물질에 대해 정신의 우위를 주장한 이원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저자는 현대의 과학자들이 모두 일원론자임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의 정신을 뇌로 치환한 이원론자나 다름없는 가정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과학자들의 철학에 대한 무시와 무지도 비판하고 있는데 이는 옳은 비판인 것 같다. 많은 과학자들이 철학을 철지난, 발전이 없는 학문으로 무시하고 있다. 나의 랩동료들도 철학도 과학이며, 과학의 일부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과학은 실증주의라는 정해진 방법론을 따르지만, 철학은 자신의 방법론 자체에 대해 회의하는 학문이므로 차원이 다르다고 반박했다. 이에 대한 그들의 반박은 실증적이지 않은 학문은 학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실증주의에 대한 맹신이 이 정도다. 저자는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학문의 기반이 되는 가정들이 얼마나 오래 전에 철학에 논의되어 온 명제들인지 모르고 있다고 비판한다. '통 속의 뇌'가 대표적이다. 그들은 이원론을 벗어났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정신이 뇌로 이름만 바뀐 이원론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더 하고 싶은 얘기들이 많지만 이 이상 나아가면 너무 전문적인 얘기들이 될 것 같다. 하지만 인지과학 석사 수준에서는 알아듣기에는 딱 적당한, 정말 흥미로운 얘기들이 많이 나오면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토론 거리를 던져주는 유익한 책이었다. 시각 과학의 거장들인 헬름홀츠, 마, 깁슨부터, 신경과학자 캔위셔, 언어심리학자 핑커, DNA 발견으로 노벨상을 탄 후 신경과학으로 분야를 옮긴 크릭, 철학자 설, 언어학자 촘스키 등등. 이런 거장들을 비판하는(생태학적 관점을 제기한 깁슨 제외) 데서 오는 대리만족도 있었을 것이다.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데서 오는 쾌감은 더 컸고.

이 분야(인지과학, 신경과학, 뇌과학, 인식론)에 관심 있는 여러분의 일독을 권한다. 다만 이 책이 주류적 입장은 아니므로, 익숙하지 않은 분이라면 주류 입장에 가까운 책을 먼저 읽어보길 권한다. 핑커의 책들과 국내 학자들이 쓴 뇌과학에 대한 책을 추천한다.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스티븐 핑커 (소소,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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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서판:인간은 본성을 타고 나는가(사이언스 클래식 2)
카테고리 과학
지은이 스티븐 핑커 (사이언스북스,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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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움직이는 뇌 뇌를 움직이는 마음
카테고리 과학
지은이 성영신 외 (해나무,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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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2. 9. 01:19
내가 평소에 쓴 글들의 주장은 대체로 진보적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보수적이라고 여겨지는 주장에 조금 동조하는 글을 써보려고 한다. 물론 드는 근거는 다르겠지만 말이다.

최근에 경기도교육청에서 학생인권조례를 만드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두발 규제를 없애는 게 꽤 논란이 되고 있는 것 같다.

참고기사1: "21세기 경쟁력은 머리털이 아니라 머릿속"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304700

참고기사1은 오마이뉴스 기사라서 두발 규제를 없애자는 쪽에 꽤 우호적인 편이다. 하지만 이 정도면 비교적 현장의 목소리를 생생히 전하며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반면 다음 기사들은 좀 문제가 있다.

참고기사2: "머리에 미쳐 공부 포기? 우릴 뭘로 보고..."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300003

참고기사3: 면암 최익현 선생도 교장 선생님 기준으론 '불량학생'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301126

참고기사2는 논리적으로 좀 문제가 있고, 참고기사3은 제목에서 이미 알 수 있듯이 말도 안 되는 유추를 사용한 쓰레기다. 뭐, 좋게 말해 개인 의견의 나열에 불과하니 기사3은 넘어가자.

참고기사2는 머리에 미쳐 공부를 포기하는 일은 없다고 말한다. 학생들 스스로가 공부에 대한 엄청난 압박을 받고 있는 작금의 교육현실에서 맞는 얘기이다. 하지만 학업과 머리 스타일이 전혀 관계가 없을까? 아니 학업과 외모, 또는 생활태도와 외모는 전혀 관계가 없을까? 학업에 대해선 모르겠지만 적어도 태도와 외모는 지극히 높은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옷은, 아니 머리 스타일까지 포함해 패션은, 일종의 기호이다. 패션은 기호학에서도 중요하게 다루는 대상이다. 현대 사회에서 의생활은 몸을 보호하는 자연적 기능보다는 자아를 표현하는 사회적 기능과 더 많이 관련된다. 우리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패션을 통해 드러낸다. 학생들이 머리와 복장을 자유롭게 하고 싶어하는 것은 자신을 표현하려는 당연한 욕구이다.

하지만 옷과 사람의 관계는 역방향으로도 영향을 미친다. 즉 입고 있는 옷이 사람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양복을 입고 길바닥에 앉지 않는다. 하지만 같은 사람에게 추리닝을 입혀놓으면 드러누울 수도 있을 것이다. 실험을 한다고 생각해보자. 어떤 집단에겐 매일 양복을 입게 하고 다른 집단에겐 매일 추리닝을 입게 한다. 그러면서 입고 있는 옷에 신경쓰지 말고 평소처럼 생활하라고 말한다. 1주일 후 두 집단의 태도는 다른 방향으로 변하지 않았을까?

외모를 자기 맘대로 하고 싶어하는 학생들이나 그 외모를 통제하고 싶어하는 선생들이나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진리를 알고 있는 것 같다. 즉 외모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자아를 표현하는 측면에서든 자아를 형성하는 측면에서든 말이다.

가장 멍청한 사람들은 외모는 학생들의 학업이나 태도와는 상관이 없는 것 아니냐고 떠드는,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들이다. 학업과는 상관 없으니 그냥 내버려두자고? 그건 모르는 일이다. 외모는 생활태도에 영향을 준다. 그리고 생활태도는 학업에 영향을 준다. 외모에 대한 규제를 없애는 것이 학생들의 자율적 통제력을 높여 주고 그것이 학습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쳐 학업 성취가 좋아질 수도 있다. 하지만 방종해져서 공부를 게을리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 진짜 문제는 학업 성적이 아니다. 우린 산타할아버지가 아니지만 겉모습만 봐도 어느 정도는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 알 수 있다. 내 학창시절을 돌이켜보면 교복을 심하게 개조해입는 애들은 개성이 강하다기보다는 불량한 애들이었다. 그들 사이에선 그렇게 입는 것이 하나의 표지였다. 즉 그것은 '자유'라기보다는 그 또래집단 내에서 잘 어울리기 위한 또 하나의 '규칙'일 뿐인 것이다. 만약 어떠한 스타일이 특정한 태도, 특히 공격적이거나 퇴폐적인 태도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면, 그 스타일을 규제하는 것이 과연 타당성이 없는 것일까?

그러므로 나는 어느 정도의 규제는 필요하다고 본다. 다만 그 규제가 그 동안 해왔던 것처럼 비합리적이어선 안 된다. 사실 구시대의 지나친 규제가 오히려 지정된 스타일을 제외한 모든 스타일이 불량한 태도의 기호가 되게끔 악영향을 끼친 게 사실이다. 이제는 학생들이 각자의 개성을 살릴 수 있도록 하면서 특정한 스타일을 규제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즉 예전의 규제가 "A만 되고 다른 건 모두 안 된다"였다면, 새로운 규제는 "모두 허용하되 Z는 안 된다."같은 게 되어야 할 것이다.

쓰고 보니 보수의 주장에 동조한 것이라기보다는 일부 진보의 주장에 태클을 걸었다고 하는 쪽이 맞을 것 같다. 나는 적어도 "외모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주장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건 사실이 아니니까.

내가 보수적인 스타일로 입기 때문에 이렇게 썼는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내 자식이 아무렇게나 입는 걸 허용할 생각이 없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길을 가다 이상하게 입고 다니는 애들을 보면 '내가 부모였으면 저 옷을 다 찢어서 못 입게 만들었을 거야.'라고 생각하곤 한다. 진심이다! 골반 밑까지 바지를 내려 입은 남학생이나 교복을 미니 스커트로 만들어서 입고 있는 여학생을 보면 '저게 내 자식이었으면 벌써 손나갔지.'라고 생각할 정도다. 나에게 '안 되는 스타일'은 이 정도밖에(?) 안 된지만 구시대에 살아서 '안 되는 스타일'이 너무 많은 어르신들이 작금의 변화에 거품을 무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1. 22. 01:15

이건 뭐 약과.

이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이던 지난 2007년에도 "얼굴 덜 예쁜 마사지 걸을 고르는 게 인생의 지혜다. 얼굴이 예쁜 여자는 이미 많은 남자들이 (거쳐 갔고)…얼굴 덜 예쁜 여자들은 서비스도 좋고…"라는 발언을 해 '재봉틀상'에 선정된 바 있다.

당시 언니네트워크는 이 대통령이 대선 합동 연설회 때 정우택 전 총청북도 지사가 "예전에 관찰사였다면 관기(官妓)라도 하나 넣어드렸을 텐데"라고 하자 "어제 온 게 정 지사가 보낸 거 아니었냐?"며 농담 주고받는 것 또한 '여성 비하 발언'으로 지적했다.

기사 출처: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10091221164740&section=03)

충북지사라는 새끼랑 주고받은 말 보면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온다. 이런 새끼들이 지도자라고 앉아있다. 저런 새끼가 대통령이란다. 이건 뭐 증오하기에 앞서 부끄러운 감정부터 먼저 든다. 아~ 저런 말을 지껄이는 애가 윗대가리에 앉아있구나. 이렇게 지껄이면 대통령 모욕이라고 잡아갈까? 하지만 내 생각엔 쟤가 먼저 국민을 모욕했다. 이쪽에서 고소하고 싶은 심정이다.

MB를 지지하시나요? 그럼 전 당신과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MB를 지지하지도 반대하지도 않으시나요?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죠.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2. 21. 22:52
매우 개인적인 글이 될 것 같지만 여기 있는 친구들과는 함께 나눌 수 있을 것 같아 씁니다.

이미 여러 번 여기 친구들과 종교에 대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기독교도도 있고 저처럼 종교가 없는 사람도 있지요. 저는 후자입니다. '무신론자'가 아닌 '종교가 없는 사람'이라고 칭한 건 둘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물을 때 자신있게 '무신론자'라고 하는 것은 좀 꺼려왔습니다. 그렇다고 불가지론자도 아니지요. 어느 쪽이냐 하면 대체로는 공자의 입장에 가까웠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 같습니다.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해선 논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보편적인 가치나 세계관, 철학에는 관심이 많았고 그런 의미에서 종교에도 관심이 있었죠.

최근에 종교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는 건 왜일까요? 계기를 하나 뽑는다면 김대중의 <옥중서신>을 접하게 된 것을 뽑아야 할 것 같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 현대사의 위인들 중에 제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그분이 온갖 고난과 역경을 딛고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것에 대해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어떻게 고난을 이겨내왔고 어떤 지혜를 품고 있었는지 궁금해서 돌아가신 후에야 뒤늦게 이 책을 읽게 된 것입니다.

옥중서신. 1: 김대중이 이희호에게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김대중 (시대의창,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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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옥중서신>을 읽으면서 더 가까이 알게 된 건 김대중보다는 예수였습니다. 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천주교 신자였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신앙심이 강한 사람이라는 것은 전혀 알지 못 했습니다. 정치적 투쟁에 대한 얘기가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할 것이라는 저의 기대와는 달리 옥중서신의 절반은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가 그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신념을 지킬 수 있었던 것, 국민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 자신을 압제하던 이들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이 신앙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는 제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속으로는 진정 지혜로운 사람은 종교에 미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김대중 전 대통령은 어리석은 사람도 미혹된 사람도 아니었으며, 풍부한 지식과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과학에 대한 그의 생각도 저와 전혀 충돌하는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으며, 대체로 지식인들이 갖추지 못 하는 경우가 많은, 사랑과 용기를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하면 그는 제가 처음으로 깊이 존경하게 된 '한국의 기독교인'입니다. 제가 비기독교인이므로 그이 종교적인 측면은 제쳐놓고 그를 존경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모든 생각과 행동들이 기독교와, 엄밀히 말하면 예수님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예수에 대한 책을 찾아보고 생각도 많이 해보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된 것이 온전히 <옥중서신> 때문만은 아니겠지요. 그럴 만한 토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기적으로 보자면 요즘 저는 고민이 많습니다. 저는 대학원 박사과정에 지원은 해놓았지만 현재로선 백수지요. 나이는 벌써 서른인데 이루어놓은 것은 없고 아버지와 둘이 살고 있습니다. 이런 제 처지를 생각하면 불안한 마음이 들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불안해한다고 해서, 훗날의 일을 미리 걱정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자꾸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리고 사소한 일들도 저를 흔듭니다. 내일만 되면, 몇 시간만 지나면, 조금만 비켜서서 보면 별 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근심걱정을 합니다. 스스로 근심걱정을 만들기도 하지요. 그러다 조금만 상황이 바뀌어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즐거워합니다. 그야말로 일희일비하는 것이지요. 또한 제가 스스로 다짐했던 것들을 스스로 깨고, 제게 계획했던 일들이 생각대로 안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런 자신을 책망하며 마음을 다잡았다가도 금세 또 마음이 흐리멍텅해질 때가 잦지요.

'나는 어린애일 때만도 못 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는 더 나은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소중한 가치들을 가슴 속에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크면서 그런 것들을 하나둘씩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겐 남아있는 것이 얼마 없어보입니다. 저의 학벌이나 지식, 재능, 교우, 재산 같은 것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마음 속에 있었던 것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일찌감치 이것이 영혼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제가 이런 상태이기 때문에 종교적 메시지들이 강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릅니다.

좀더 장기적으로 보자면 저는 비록 종교가 없지만 그렇다고 종교 밖에서 어떤 대안을 찾지도 못 했기 때문입니다. 저를 감히 과학자라고 하기엔 부족한 점이 많지만 적어도 과학자로서 훈련을 받았고(인지 분야의 심리학 대학원에서 하는 일이 이것입니다.) 과학을 깊이 신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이 모든 문제에 해답을 준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인간의 이성을 과신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아주 오래 전부터 과학주의(인식론에서 과학의 한계를 인정하고 다른 인식방법을 허용하는 입장에 반대하여 과학적 인식을 최고위의 유일한 인식방법으로 삼는 입장)를 부정해왔습니다. 과학은 세상을 관찰하는 탁월한 방법이며, 객관적 진리를 이끌어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실존적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 합니다.

만들어진 신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리처드 도킨스 (김영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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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읽고 그 책의 서평회에도 갔습니다. 큰 반향을 일으켜서 어떤 이야기들이 있나 무척 흥미를 갖고 그 책을 읽었지만 그 책에서 다룬 종교에 대한 비판들은 대부분 저도 생각했거나 생각할 수 있었던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전 도킨스의 주장에 대부분 공감했으며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단 하나 종교가 필요없다는 것을 빼고 말이죠. 당시 서평회 강의는 장대익 교수가 맡았는데 질의 응답 시간에 저는 그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인간은 삶에 대해 궁금해하고, 의미를 찾으려는 강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호기심과 욕구는 진화론적으로도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종교가 없어진다면 과학이 과연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가?" 장 교수는 과학을 통해 우주에 만물에 대한 신비를 알아가는 황홀한 경험이 그런 욕구를 대신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대답은 불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의미에 대한 것은 전혀 언급이 없었죠. 과학주의의 입장에서 생각해봐도 1) 세상이 무의미하다는 것과 2) 인간이 의미에 대한 강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모두 과학적 사실이기 때문에, 3) 과학만으로는 인간의 욕구를 충족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인식이나 욕구의 문제를 떠나서 실존의 문제로 들어가면 더욱 더 그렇습니다. 우리는 합리적인 사고방식과 일반적인 예의범절을 바탕으로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인생에 별다른 굴곡이 없다면 그렇겠지요. 극한의 상황에 처하지 않는다면 그렇겠지요. 인생의 과제들은 주어질 것이고 때로는 그것들을 풀기가 힘겹겠지만 기본적인 도덕관과 이성으로 그것들을 해결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극한의 상황에서도 그럴까요? 아우슈비츠의 유태인까지 가지 않아도 됩니다. 허무하게 자식을 잃은 어머니, 불행한 사고로 불구가 된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거기에 어떤 해결책이 있을 수 있을까요? 또는 가족이 자신을 괴롭히거나 큰 잘못을 저지른다고 합시다. 하지만 가족이기에 그들을 완전히 내칠 수도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어느 한 도덕을 깨지 않고 해결책은 없고 마음의 괴로움만 늘어갈 것입니다. 불의한 세력이 너무 커서 도저히 맞설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하나요? 좌절만이 계속되겠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이성과 도덕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 합니다. 글쎄요, 잘 분석하면 이성과 도덕이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상황에 처한, 실존하는, 살고 있는 인간을 생각해봅시다. 과연 도움이 될까요? 책상 위에서만 효력있는 해결책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이 얘기를 꺼내니 제가 종교를 도덕의 다른 차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채셨겠죠? 저는 과학주의보다 도덕주의를 더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도덕은 중요한 가치이나 근원적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 합니다. 모두를 포용하지도 못 하지요. 그것은 그저 현실의 여러 문제들을 올바르게 풀어나갈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해주는 정도에 그치지요.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채워주지는 못 합니다. 그래서 유교의 지배가 그렇게 강했던 조선에서도 왕실에선 불교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고, 조선 후기에는 수많은 유학자들이 천주교에 귀의했습니다.

아마 종교가 그저 특정한 차원의 도덕에 불과했다면 저는 종교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수년전 신약을 읽었을 때 가장 감탄했던 건 예수가 도덕주의자들인 바리새인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많이 비판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구원이 도덕이 아니라 믿음에 기반한다는 건 정말 놀라운 것이었죠. 제가 기독교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을 때조차도 이런 점들은 위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기독교가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 종교였다면 무시했을 것입니다.

자, 이제 '종교'란 말을 그냥 '기독교'로 바꾸렵니다. 눈치채셨겠지만 현재 제 관심은 일반적인 종교가 아닌 기독교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엄밀히 말하면 '예수'에 있다고 해야할 것입니다. 솔직히 신약이 없다면 구약 따위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흠, 기독교인이 아니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걸까요? 신성모독? -_-)

사실 몇 년 전 기독교에 귀의할 뻔한 적도 있습니다. 굉장히 힘든 시기였고, 실존적 위기를 겪고 있었거든요. 근데 우연히 찾아가게(이끌려가게?) 된 곳이 성경을 상당히 보수적으로 해석하는 곳이어서 금방 돌아왔습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창세기를 하고 있더라고요. 전 진화론자거든요. 그리고 전 진화론을 포기할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위의 과학이나 도덕에 대한 생각이 제 정체성의 일부를 형성하듯이 진화론도 제 정체성의 일부입니다. 왜 기독교는 지동설을 받아들인 것처럼 진화론을 용인하지 못 하는 걸까요? 기독 신앙과 진화론이 양립할 수 없다면 전 현상태을 유지할 것입니다.

하지만 둘이 양립할 수 있다는 걸 봤죠. 일단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예가 있죠. 그는 인류의 진화를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도 믿죠. 제 랩 친구들 중에도 있었습니다. 인지랩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이 당연히 그 친구도 진화론자에 일원주의자에 저보다 더 한 환원주의자였죠. 하지만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어요.

결론은 아직 없습니다. 제가 기독교인이 됐다는 것도 아니고 될 거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축자영감설 때문에 예장(대한예수교 장로회)은 죽어도 안 되겠지만 어쩌면 감리교나 성공회나 가톨릭이 될 지도 모르죠. 아님 퀘이커? 뭐, 교파가 중요한 건 아니죠. 가장 중요한 건 예수님이니까요. 제가 이렇게까지 흔들리는 건 오직 예수님의 행적 때문입니다. 불교도 제 영혼을 채워줄(이 경우엔 비운다고 해야 적절할까요?)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기독교에 끌리게 된 건 예수님 때문이죠.

매우 길게 썼습니다. 이런 글을 쓴 건 여러분과 이 얘기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여기 승무원들이나 이곳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모두 저의 친우들입니다. 제가 요즘 무슨 생각을 하며 지내는지 털어놓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서로 만나기가 쉽지 않고, 또 이 긴 얘기를 직접 만나서 쭉 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서 여기에 썼습니다.

그리고 정말 이 얘기 꼭 하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정말 이 문제는 지금 제 가장 큰 관심사니까요. 하지만 얘기나눌 사람이 별로 없답니다. (저희 아버지는 종교를 실용적으로만 파악하시는 무신론자고, 유교에 기반한 도덕주의자입니다. 그리고 가까운 친지들도 전부 무교죠. 촌수를 좀더 멀리 가면 신부를 배출한 집안이 있을 정도로 가톨릭이 꽤 있지만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친척이지요.)

여러분의 허심탄회한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다행히 이 중에는 기독교도도 있고 비종교인도 있으니 다양한 얘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끼리 종교 문제로 다툰 적도 없으니 그런 거 걱정 안 해도 되겠죠?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1. 02:56
쓴다쓴다 하면서도 게으름 때문에 글을 못 쓰고 있었다.

1.
안의 <실종일기> 감상문을 읽고 나도 <사채꾼 우시지마>의 감상문을 쓰고 싶었다. 인생의 밑바닥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만화랄까? <실종일기>와는 달리 내용도 그림체도 명랑하지 않다. 옴니버스 형식이라 매 권 중심인물이 바뀌는데 가끔은 감정이입도 쉽지 않다. 스스로 인생을 망치고 있는 인물들도 꽤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나약함조차도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그들은 나와 전혀 다른 인간이라고 쉽사리 부정할 수만은 없다. 사악하면서도 나약하고 비겁한 인물들의 개인적 과오와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고 그 욕망을 이용해 인간성을 파괴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부조리가 만들어내는 지옥, 그것이 이 만화가 그리는 세상이다. 그 지옥 끝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자는 먼저 절망부터 경험해야 한다.



2.
요즘 기독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있다. 계기는 김대중의 <옥중서신>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신념과 독재 정권에 맞선 투쟁으로 상당 부분 채워져있을 거란 예상과는 달리 그의 서신의 반 이상은 신앙에 관한 것이었다. 핍박을 겪으면서도 그는 끊임없이 신앙을 고백하고 예수님께 의지하면서 뜻을 잃지 않았다. 사실 반독재 투쟁도 예수의 이웃 사랑을 실천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고난으로 단련된 신앙이기에 비신자인 내가 보기에도 그의 신앙은 진실되고 믿을 수 있었다. 게다가 그는 종교적으로 배타적이지 않았다. 그가 편지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의 결혼 자체가 상당히 에큐메니컬한 것이었다. (DJ는 천주교도, 이희호 여사는 개신교도이다.) 그는 여러 교파를 초월해 함께 투쟁해나가기 위해 노력했으며, 현대의 과학을 인정했으며, 비신자들을 배척하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이명박 같은 이의 기독교는 얼마나 천박한가. 그와 그를 따르는 이들은 예수가 아니라 물신을 섬기는 것이며, 그들이 스스로를 도덕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바리새인의 도덕에 불과할 것이다. 아무튼 이명박이 떨어뜨려놓은 나의 기독교에 대한 인상을 김대중이 다시 올려놓고 있다.

옥중서신. 1: 김대중이 이희호에게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김대중 (시대의창,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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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는 게 아니고, 그것이 이 책의 교훈도 아니다. 내가 정말 진지하게 생각하는 건 그러한 고통과 역경 속에서도 의지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그의 신앙 때문이었나 하는 점이다. 나는 종교인은 아니지만 인간의 이성을 과신하지 않으며 나란 사람이 얼마나 나약한가를 매일 느끼고 있다. 자신의 이성과 의지만을 믿고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며,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에 누군가에 의지한다. 그러나 우리가 의지하는 것들조차 불완전하기 그지없다. 그렇다면 절대자에 의지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신앙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것인가? (마치 우리 학교 교훈처럼 말이다.) 내 안의 어둠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된다.


3.
<자유의지, 그 환상의 진화>란 책을 읽고 있다. 아직 반밖에 못 읽었지만 내 생각과 완전히 일치하는 구절을 발견했다.

자유의지 그 환상의 진화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프란츠 M. 부케티츠 (열음사,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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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신경 생물학 및 진화에 대한 연구, 생태학과 그 밖의 다른 (생물학) 분야에서 알려준 바에 따르면, 이른바 모든 정신 상태는 신경 프로세스들에 의존해 있다. 그리고 그 프로세스들은 오랜 진화의 역사를 통해 선택되고 안정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신경 상태와 정신 상태를 '동일시하는' 것의 정당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미 오래전에, 뇌(혹은 다른 기관)에서 정신(영혼 혹은 의지)의 "본거지"를 찾는 작업은 시대에 뒤떨어진 일이라는 게 판명 났다. (인간) 뇌의 섬세한 구조에 대한 그토록 상세한 지식조차도 우리가 그곳에서 생각이나 결정이나 욕망이나 기대나 기쁨이나 근심을 인식하게 해주지 못한다. 이것들은 뇌에 "거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뇌의 특수한 특성이다. 정신 현상이란 뇌 '시스템의 특성'이라는 것이 요점인데, 이는 특정한 기관들(주족, 날개, 지느러미)의 특성이 운동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 누구도 이런 기관들에서 운동 자체를 찾아내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비유적인 의미로만 뇌가 의식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여기서 뇌와 정신의 단일성을 이야기할 때 그것이 "서로 환원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125~126쪽)

내가 인지심리학 대학원에서 동료들과 가장 많이 다투었던 철학적 문제가 바로 저것이었다. 인지심리학도들이었으므로 우리는 당연히 일원론자였다. (왜 당연한지는, 이쪽 분야 분위기를 보면 안다. 심리학의 여러 분야 중에서 가장 '하드 사이언스'를 추구한다.) 그러나 나는 일원론자이면서 환원주의자가 아니었다. 나는 당연히 인간 정신은 뇌에서 발현된다는 걸 '알지만' 뇌 연구를 통해 인간 정신의 모든 비밀을 밝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뇌에 대한 물리적, 생리화학적 연구는 인간 정신의 비밀 중 일부분만을 밝혀줄 것이다. 뇌의 구조가 아닌 상태를 찍는 fMRI를 이용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나는 어떠한 현상의 물리적 기반의 원리와 그 현상의 원리가 같다고 할 수는 없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세계는 물질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일원론자이면서 물리 현상과 정신 현상의 원리는 다를 수 있다는 이중론자이다. 이 책의 저자의 생각이 내 생각과 완전히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저 구절은 내 생각과 상당히 비슷하다고 느꼈다. 진화론에 대한 강한 긍정과 환원론에 대한 부정이 함께 담겨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
셋 다 좀 길게 쓰고 싶었는데 그냥 짧게 써서 올린다. 글 쓰는 데 너무 부담 갖다 보니 오히려 못 쓰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냥 생각나는 대로 써보았다. 다음엔 아마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를 읽은 것에 대해 쓰지 않을까 싶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 14:17
  남한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두 나라를 고르라면 북한과 미국이 꼽힐 것이다. 그리고 이분법적인 태도는 좋지 않지만 굳이 두 나라에 대한 태도를 둘로 나눈다면 친북과 반북, 친미와 반미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2 곱하기 2, 두 나라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정치적 성향을 나눈다면 친북친미, 친북반미, 반북친미, 반북반미, 이렇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두 나라에 대해 찬성 또는 반대의 입장을 취하려면 어떤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기준은 널리 받아들여질 수 있는 보편적 기준이거나, 현 상황에서 우리나라에 유익한 기준이어야 할 것이다.

  보편적 기준 중에서도 가장 보편적인 것은 황금률이다.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것. 그중에는 남을 괴롭히지 말라는 것도 포함된다. 민주주의, 자유, 평등, 인권 등 여러 가지 보편적 기준이 있을 수 있지만 뭉뚱그려 모두 황금률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이 기준에 따르면 미국이나 북한이나 낙제점이다. 미국은 비록 국내에선 비교적 이 기준을 지키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국외에선 어느 나라보다도 이 기준을 많이 어기고 있다. 대인지뢰금지협약(http://100.naver.com/100.nhn?docid=775619)을 비롯해 각종 범인류적으로 필요한 협약들에 가입하지 않고 있는 나라가 미국이다.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로 건국된 국가이며, 남미 및 후진국을 착취해가며 성장한 나라이다. 민주주의 가치의 전파에 공헌한 바가 없지는 않지만 범세계적으로 봐선 부정적 영향이 너무나 컸던 나라이다.
  북한은 어떤가? 겉보기에 이상적인 사회주의 이념을 근간으로 자주적인 국가를 설립했다. 친일파를 숙청하고 토지 개혁으로 핍박받던 농민들이 먹고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3년도 지나지 않아 전쟁을 일으켰으며 이념 수호를 명분으로 수많은 정치지도자를 숙청했다. 그후에는 사회주의 이념도 썩어문드러져 출신성분에 따라 차별하는 것이 당연해지고, 공산주의 국가는 허울에 불과하다는 듯이 잘먹고 잘사는 지도층과 굶고 헐벗는 대다수 인민들로 나누어졌다. 그리고는 자유를 갈구하는 인민들의 인권을 철저히 탄압하고 있다.
  그러므로 보편적 기준, 이상에 근거할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친북친미이다.

  하지만 정치와 외교가 항상 보편적 기준, 이상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동아시아의 조그만 나라 남한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세계 10대 무역국이라고는 하나 군사적, 외교적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기에는 주위에 강한 국가들이 너무 많다. 따라서 독자적인 활동을 하기보다는 연대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현재로서는 가장 강력한 국가인 미국과 연대하는 것이 가장 유리하다. 설사 미국에 적극적인 협력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미국을 적대시하는 것은 진정 어리석은 선택이 될 것이다. '용미'가 가장 현실적인 태도일 것이며, 굳이 이를 친미와 반미 중 하나로 분류해야 한다면 친미가 될 것이다.
  북한은 어떤가? 북한을 적대시하는 것도 남한의 이익과 평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평화를 위해서도 북한과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북한의 현 정권을 인정하고 개방을 유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점진적 개방을 통해 북한의 인권 상황을 개선하는 것이 현실적으로나 이상적으로나 가장 적절한 방안이다. 지금 북한을 비난한다면 북한은 더더욱 문을 닫을 것이며, 결과적으로 북한 인민의 생활 개선은 더더욱 요원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남한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도 북한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경제개방을 유도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북한과의 협력'이며, 이를 친북과 반북 중 하나로 분류해야 한다면 친북이 될 것이다.

  자, 이상과 현실에 따라 판단해 보았을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반북반미거나 친북친미였다. 그리고 아마도 더 이상적일 수 있는 재야세력은 반북반미가, 현실적이어야 할 정치세력은 친북친미가 주가 될 것이라고 예상해볼 수 있다. 근데 어쩐 일인가? 이 나라엔 오히려 반북친미와 친북반미가 넘치고 있다.

  반북친미의 기준은 무엇인가? 이는 사실 단순하다. 북한은 독재국가, 미국은 민주국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전쟁 때 남한의 적국은 북한이었고, 동맹국은 미국이었다는 것이다. 아주 단순하지만 비논리적인 것은 아니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기준이긴 하지만 이해하기도 쉽다. 이에 대한 반박은 있을 수 있다. 북한은 한 민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민족주의를 차치하고 본다면 반북을 이해 못 할 바도 아니다. 다만 이러한 태도가 낳을 부작용이 걱정이다. 반북친미적인 입장이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것이라는 것이다. 반북은 북한을 더욱 폐쇄적으로 만들어 북한 인민의 생활을 악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지나친 친미적 태도로 인해 실제 미국이 저질렀거나 저지르고 있는 악행들조차도 덮어질 우려가 있다. 따라서 반북친미는 상당히 유아적이고 근시안적인 태도이다.

  그렇다면 친북반미는 어떤가? 솔직히 이런 태도는 쉽게 이해하기 힘들고 정신적으로 매우 뒤틀려 있는 태도라 할 수 있다. 미국의 악행이 아무리 크다 해도 미국만 반대하고 북한만 편들기에는 북한의 악행도 만만치 않다. 적어도 미국은 자국민을 이렇게 학대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그렇지만 남한의 지도자들도 역시 같은 민족이다. 친북반미를 외치는 사람들은 남한의 지도자들에 대해선 극히 비판적이면서 북한의 지도자들에게는 매우 관대한 잣대를 갖다댄다. 이는 이중잣대가 아닌가? 가끔 이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나라는 미국이 아닌가하는 아이러니한 생각도 드는데, 왜냐면 미국에 가장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지고의 정신적 사랑이라면,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이 더 도덕적이길 원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보다는 가까운 대상에 대해 더 잘 알기 때문에 더 비판적일 수 있다는 것이 맞는 해석일 것 같다. 그러므로 가장 가까운 남한 정부, 그 다음인 미국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 정부에 대해 우호적인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예를 들면 이승만과 김일성에 대한 태도를 비교할 수 있다. 친북반미적 태도를 가진 사람들은 이승만에 대해선 극도로 비판적이지만 김일성에 대해선 우호적이거나 중립적이다. 하지만 둘 다 독립운동가였고 독재자였다. 둘 모두 공과를 얘기해야 하지 않을까? 이승만과 김일성을 미국과 북한으로 바꿔 놓아도 마찬가지이다. 친북반미의 가장 큰 문제는 어떤 역사적 문제를 다루든 드러나는 이중잣대이다.

  나는 북한과 미국에 대한 논쟁이 친북친미와 반북반미의 논쟁이 되길 바란다. 그 논쟁이 합리적인 토론으로 발전된다면 이상과 현실 사이의 조화지점을 찾는 유익한 논의가 될 것이다. 하지만 현 상황은 반북친미와 친북반미의 논쟁이다. 이 두 입장은 모두 심각한 오류를 안고 있는데다, 양측 모두 상당히 교조주의적이라는 점에서 발전적인 논의는 요원해보인다. 매우 안타까운 상황이다. 그리고 더 안타까운 점은 이들의 힘싸움 때문에 합리적인 친북친미, 반북반미 세력이 잊혀질 것 같다는 점이다.
  남한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힘있는 친북친미주의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그는 집권 기간 중 형식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친북친미정책을 추진했고, 미 클린턴 집권 시절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이가 노무현이었는데 그는 실질적으로 친북친미 정책을 추진했으나 형식적인 측면에서 친북반미로 오해를 살 만한 일이 많아 그 효과가 반감되었다. 이제 둘 다 세상을 떠난 지금 정치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친북친미 정책을 주도적으로 펴나갈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

  합리적인 진보세력이라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지를 이어야 한다. 그러나 과연 진보세력 중에 그런 세력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회의가 깊다. 상당수의 진보세력은 친북친미라기보다는 친북반미에 가깝다. 미국을 비판하는 것은 좋지만 가끔 그들의 이중잣대는 짜증날 정도다. 상당히 유명한 책인 <대한민국사>(한홍구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1권을 보자.

두 형제가 있었다. 한 쪽은 체면에 구애받지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었다. 다른 한 쪽은 자존심과 체면을 중시하면서 가난하게 살았다.

  당연히 전자는 남한, 후자는 북한이다. 북한을 마치 절개 높은 선비가 벼슬에 나가지 않아 고난을 감내한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 아무리 좋게 보아줘도 북한을 그냥 '자존심과 체면을 중시'해서 어쩔 수 없이 가난하게 산 나라로 보아줄 수 있는가? 이 책에는 저런 식의 표현이 비일비재한데 이중잣대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진중권, 우석훈 등 진보주의자들의 책을 많이 읽었지만 <대한민국사>를 읽고서는 상당한 불쾌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진보의 대표로 여겨지고 있으며, 반북친미 세력만큼이나 친북친미가 설 자리를 좁히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6.15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인가. 나는 적어도 죽기 전에는 통일이 된 세상을 보고 싶다. 그리고 그 전에 우선 꼴통 반북친미주의자와 교조적 친북반미주의자들이 힘을 잃고, 현실과 이상의 합리적 조화를 논하는 세상이 와야 할 것이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0. 7. 02:21

  '저희나라'라는 말이 있다. 유명인이 쓰면 나라 욕 먹인다는 소리를 듣기도 하는 말이다. 잘못된 표현이라고 한다. 이유는? 자신은 낮출 수 있어도 자신보다 크고 말을 듣는 상대방보다도 큰 존재를 낮출 수는 없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저희 아버지', '저희 학교', '저희 회사'같은 말은 잘도 쓰지 않는가? '저희 고고조할아버지'도 되지 않는가?

  나라 사이에는 위아래가 없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나라만 위아래가 없나? 신분제가 철폐된 사회에선 가문 사이에도 위아래가 없다. 근데 왜 '저희 증조부'같은 말에 시비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걸까? '저희나라'란 말을 들을 때마다 게거품을 무는 사람들이 국어학적인 설명을 동원해봤자 그 설명들은 국어학적으로 전혀 타당하지 않다. 그들은 그저 나라가 자신의 자존심과 정체성의 근간을 이루기 때문에 그런 말을 쓰기 싫어서, 어떻게든 설명을 갖다붙이는 게 아닐까?

  하지만! '저희나라'란 표현이 일반적으로 틀린 표현인 것은 맞다. 그건 사실 나라 사이엔 위아래가 없다거나, 자신보다 큰 존재는 낮출 수 없다거나 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집'을 써야할 때 '저희집'을 쓰는 실수 같은 것이다. 우린 엄마한테 얘기하면서 '저희집'이라고 하지 않는다. '우리집'이라고 하지. 말하는 '나'와 듣는 '엄마'가 모드 '우리집'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생님한테 얘기할 때는 '저희집'이라고 한다. 선생님은 '우리집'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럴 때 '우리집'이라고 하면 조금 무례하게 들릴 것이다.

  한국어는, 최근에 한국어를 하는 외국인이 많아졌다고 해도, 거의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만 사용되는 언어이다. 우리가 한국어로 '우리나라' 또는 '저희나라'라고 말할 때, 듣는 이도 한국 사람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저희나라'라고 말하게 되면 말하는 이와 듣는 이를 모두 낮추는, 사실은 겸양 표현이 아닌, 웃기는 표현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라고 하는 것이 맞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경우 '저희나라'는 틀렸고 '우리나라'가 맞다.

  하지만 '저희나라'도 쓸 수 있다. 듣는 사람이 다른 나라 사람이고 말하는 이보다 높은 사람이라면 말이다. 한국어가 유창한 외국인 노교수와 얘기하게 된다면, 나는 '우리나라'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저희나라'라고 말하지. '저희나라'도 우리나라 말이다. 우리말 문법이나 화법에 비춰볼 때 전혀 틀린 말이 아닌데 왜 쓰지 말아야 한단 말인가? 그게 그렇게 기분 나쁜가? 그게 그렇게 기분 나쁘다면 차라리 '한국'이라고 말하자.

  난 외국인 노교수 앞에서 '우리나라'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건 마치 '제가'가 아니라 '내가'라고 하는 것처럼 내 신경을 거스른다. 그리고 내 신경은 '국가와 자존심'보다는 '개인간 예의'에 더 닿아있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0. 3.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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