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개인적인 글이 될 것 같지만 여기 있는 친구들과는 함께 나눌 수 있을 것 같아 씁니다.

이미 여러 번 여기 친구들과 종교에 대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기독교도도 있고 저처럼 종교가 없는 사람도 있지요. 저는 후자입니다. '무신론자'가 아닌 '종교가 없는 사람'이라고 칭한 건 둘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물을 때 자신있게 '무신론자'라고 하는 것은 좀 꺼려왔습니다. 그렇다고 불가지론자도 아니지요. 어느 쪽이냐 하면 대체로는 공자의 입장에 가까웠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 같습니다.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해선 논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보편적인 가치나 세계관, 철학에는 관심이 많았고 그런 의미에서 종교에도 관심이 있었죠.

최근에 종교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는 건 왜일까요? 계기를 하나 뽑는다면 김대중의 <옥중서신>을 접하게 된 것을 뽑아야 할 것 같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 현대사의 위인들 중에 제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그분이 온갖 고난과 역경을 딛고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것에 대해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어떻게 고난을 이겨내왔고 어떤 지혜를 품고 있었는지 궁금해서 돌아가신 후에야 뒤늦게 이 책을 읽게 된 것입니다.

옥중서신. 1: 김대중이 이희호에게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김대중 (시대의창,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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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옥중서신>을 읽으면서 더 가까이 알게 된 건 김대중보다는 예수였습니다. 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천주교 신자였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신앙심이 강한 사람이라는 것은 전혀 알지 못 했습니다. 정치적 투쟁에 대한 얘기가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할 것이라는 저의 기대와는 달리 옥중서신의 절반은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가 그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신념을 지킬 수 있었던 것, 국민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 자신을 압제하던 이들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이 신앙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는 제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속으로는 진정 지혜로운 사람은 종교에 미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김대중 전 대통령은 어리석은 사람도 미혹된 사람도 아니었으며, 풍부한 지식과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과학에 대한 그의 생각도 저와 전혀 충돌하는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으며, 대체로 지식인들이 갖추지 못 하는 경우가 많은, 사랑과 용기를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하면 그는 제가 처음으로 깊이 존경하게 된 '한국의 기독교인'입니다. 제가 비기독교인이므로 그이 종교적인 측면은 제쳐놓고 그를 존경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모든 생각과 행동들이 기독교와, 엄밀히 말하면 예수님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예수에 대한 책을 찾아보고 생각도 많이 해보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된 것이 온전히 <옥중서신> 때문만은 아니겠지요. 그럴 만한 토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기적으로 보자면 요즘 저는 고민이 많습니다. 저는 대학원 박사과정에 지원은 해놓았지만 현재로선 백수지요. 나이는 벌써 서른인데 이루어놓은 것은 없고 아버지와 둘이 살고 있습니다. 이런 제 처지를 생각하면 불안한 마음이 들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불안해한다고 해서, 훗날의 일을 미리 걱정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자꾸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리고 사소한 일들도 저를 흔듭니다. 내일만 되면, 몇 시간만 지나면, 조금만 비켜서서 보면 별 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근심걱정을 합니다. 스스로 근심걱정을 만들기도 하지요. 그러다 조금만 상황이 바뀌어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즐거워합니다. 그야말로 일희일비하는 것이지요. 또한 제가 스스로 다짐했던 것들을 스스로 깨고, 제게 계획했던 일들이 생각대로 안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런 자신을 책망하며 마음을 다잡았다가도 금세 또 마음이 흐리멍텅해질 때가 잦지요.

'나는 어린애일 때만도 못 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는 더 나은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소중한 가치들을 가슴 속에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크면서 그런 것들을 하나둘씩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겐 남아있는 것이 얼마 없어보입니다. 저의 학벌이나 지식, 재능, 교우, 재산 같은 것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마음 속에 있었던 것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일찌감치 이것이 영혼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제가 이런 상태이기 때문에 종교적 메시지들이 강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릅니다.

좀더 장기적으로 보자면 저는 비록 종교가 없지만 그렇다고 종교 밖에서 어떤 대안을 찾지도 못 했기 때문입니다. 저를 감히 과학자라고 하기엔 부족한 점이 많지만 적어도 과학자로서 훈련을 받았고(인지 분야의 심리학 대학원에서 하는 일이 이것입니다.) 과학을 깊이 신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이 모든 문제에 해답을 준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인간의 이성을 과신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아주 오래 전부터 과학주의(인식론에서 과학의 한계를 인정하고 다른 인식방법을 허용하는 입장에 반대하여 과학적 인식을 최고위의 유일한 인식방법으로 삼는 입장)를 부정해왔습니다. 과학은 세상을 관찰하는 탁월한 방법이며, 객관적 진리를 이끌어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실존적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 합니다.

만들어진 신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리처드 도킨스 (김영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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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읽고 그 책의 서평회에도 갔습니다. 큰 반향을 일으켜서 어떤 이야기들이 있나 무척 흥미를 갖고 그 책을 읽었지만 그 책에서 다룬 종교에 대한 비판들은 대부분 저도 생각했거나 생각할 수 있었던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전 도킨스의 주장에 대부분 공감했으며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단 하나 종교가 필요없다는 것을 빼고 말이죠. 당시 서평회 강의는 장대익 교수가 맡았는데 질의 응답 시간에 저는 그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인간은 삶에 대해 궁금해하고, 의미를 찾으려는 강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호기심과 욕구는 진화론적으로도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종교가 없어진다면 과학이 과연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가?" 장 교수는 과학을 통해 우주에 만물에 대한 신비를 알아가는 황홀한 경험이 그런 욕구를 대신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대답은 불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의미에 대한 것은 전혀 언급이 없었죠. 과학주의의 입장에서 생각해봐도 1) 세상이 무의미하다는 것과 2) 인간이 의미에 대한 강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모두 과학적 사실이기 때문에, 3) 과학만으로는 인간의 욕구를 충족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인식이나 욕구의 문제를 떠나서 실존의 문제로 들어가면 더욱 더 그렇습니다. 우리는 합리적인 사고방식과 일반적인 예의범절을 바탕으로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인생에 별다른 굴곡이 없다면 그렇겠지요. 극한의 상황에 처하지 않는다면 그렇겠지요. 인생의 과제들은 주어질 것이고 때로는 그것들을 풀기가 힘겹겠지만 기본적인 도덕관과 이성으로 그것들을 해결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극한의 상황에서도 그럴까요? 아우슈비츠의 유태인까지 가지 않아도 됩니다. 허무하게 자식을 잃은 어머니, 불행한 사고로 불구가 된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거기에 어떤 해결책이 있을 수 있을까요? 또는 가족이 자신을 괴롭히거나 큰 잘못을 저지른다고 합시다. 하지만 가족이기에 그들을 완전히 내칠 수도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어느 한 도덕을 깨지 않고 해결책은 없고 마음의 괴로움만 늘어갈 것입니다. 불의한 세력이 너무 커서 도저히 맞설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하나요? 좌절만이 계속되겠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이성과 도덕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 합니다. 글쎄요, 잘 분석하면 이성과 도덕이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상황에 처한, 실존하는, 살고 있는 인간을 생각해봅시다. 과연 도움이 될까요? 책상 위에서만 효력있는 해결책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이 얘기를 꺼내니 제가 종교를 도덕의 다른 차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채셨겠죠? 저는 과학주의보다 도덕주의를 더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도덕은 중요한 가치이나 근원적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 합니다. 모두를 포용하지도 못 하지요. 그것은 그저 현실의 여러 문제들을 올바르게 풀어나갈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해주는 정도에 그치지요.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채워주지는 못 합니다. 그래서 유교의 지배가 그렇게 강했던 조선에서도 왕실에선 불교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고, 조선 후기에는 수많은 유학자들이 천주교에 귀의했습니다.

아마 종교가 그저 특정한 차원의 도덕에 불과했다면 저는 종교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수년전 신약을 읽었을 때 가장 감탄했던 건 예수가 도덕주의자들인 바리새인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많이 비판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구원이 도덕이 아니라 믿음에 기반한다는 건 정말 놀라운 것이었죠. 제가 기독교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을 때조차도 이런 점들은 위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기독교가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 종교였다면 무시했을 것입니다.

자, 이제 '종교'란 말을 그냥 '기독교'로 바꾸렵니다. 눈치채셨겠지만 현재 제 관심은 일반적인 종교가 아닌 기독교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엄밀히 말하면 '예수'에 있다고 해야할 것입니다. 솔직히 신약이 없다면 구약 따위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흠, 기독교인이 아니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걸까요? 신성모독? -_-)

사실 몇 년 전 기독교에 귀의할 뻔한 적도 있습니다. 굉장히 힘든 시기였고, 실존적 위기를 겪고 있었거든요. 근데 우연히 찾아가게(이끌려가게?) 된 곳이 성경을 상당히 보수적으로 해석하는 곳이어서 금방 돌아왔습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창세기를 하고 있더라고요. 전 진화론자거든요. 그리고 전 진화론을 포기할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위의 과학이나 도덕에 대한 생각이 제 정체성의 일부를 형성하듯이 진화론도 제 정체성의 일부입니다. 왜 기독교는 지동설을 받아들인 것처럼 진화론을 용인하지 못 하는 걸까요? 기독 신앙과 진화론이 양립할 수 없다면 전 현상태을 유지할 것입니다.

하지만 둘이 양립할 수 있다는 걸 봤죠. 일단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예가 있죠. 그는 인류의 진화를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도 믿죠. 제 랩 친구들 중에도 있었습니다. 인지랩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이 당연히 그 친구도 진화론자에 일원주의자에 저보다 더 한 환원주의자였죠. 하지만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어요.

결론은 아직 없습니다. 제가 기독교인이 됐다는 것도 아니고 될 거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축자영감설 때문에 예장(대한예수교 장로회)은 죽어도 안 되겠지만 어쩌면 감리교나 성공회나 가톨릭이 될 지도 모르죠. 아님 퀘이커? 뭐, 교파가 중요한 건 아니죠. 가장 중요한 건 예수님이니까요. 제가 이렇게까지 흔들리는 건 오직 예수님의 행적 때문입니다. 불교도 제 영혼을 채워줄(이 경우엔 비운다고 해야 적절할까요?)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기독교에 끌리게 된 건 예수님 때문이죠.

매우 길게 썼습니다. 이런 글을 쓴 건 여러분과 이 얘기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여기 승무원들이나 이곳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모두 저의 친우들입니다. 제가 요즘 무슨 생각을 하며 지내는지 털어놓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서로 만나기가 쉽지 않고, 또 이 긴 얘기를 직접 만나서 쭉 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서 여기에 썼습니다.

그리고 정말 이 얘기 꼭 하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정말 이 문제는 지금 제 가장 큰 관심사니까요. 하지만 얘기나눌 사람이 별로 없답니다. (저희 아버지는 종교를 실용적으로만 파악하시는 무신론자고, 유교에 기반한 도덕주의자입니다. 그리고 가까운 친지들도 전부 무교죠. 촌수를 좀더 멀리 가면 신부를 배출한 집안이 있을 정도로 가톨릭이 꽤 있지만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친척이지요.)

여러분의 허심탄회한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다행히 이 중에는 기독교도도 있고 비종교인도 있으니 다양한 얘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끼리 종교 문제로 다툰 적도 없으니 그런 거 걱정 안 해도 되겠죠?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1. 0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