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개인적인 글이 될 것 같지만 여기 있는 친구들과는 함께 나눌 수 있을 것 같아 씁니다.

이미 여러 번 여기 친구들과 종교에 대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기독교도도 있고 저처럼 종교가 없는 사람도 있지요. 저는 후자입니다. '무신론자'가 아닌 '종교가 없는 사람'이라고 칭한 건 둘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물을 때 자신있게 '무신론자'라고 하는 것은 좀 꺼려왔습니다. 그렇다고 불가지론자도 아니지요. 어느 쪽이냐 하면 대체로는 공자의 입장에 가까웠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 같습니다.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해선 논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보편적인 가치나 세계관, 철학에는 관심이 많았고 그런 의미에서 종교에도 관심이 있었죠.

최근에 종교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는 건 왜일까요? 계기를 하나 뽑는다면 김대중의 <옥중서신>을 접하게 된 것을 뽑아야 할 것 같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 현대사의 위인들 중에 제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그분이 온갖 고난과 역경을 딛고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것에 대해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어떻게 고난을 이겨내왔고 어떤 지혜를 품고 있었는지 궁금해서 돌아가신 후에야 뒤늦게 이 책을 읽게 된 것입니다.

옥중서신. 1: 김대중이 이희호에게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김대중 (시대의창,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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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옥중서신>을 읽으면서 더 가까이 알게 된 건 김대중보다는 예수였습니다. 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천주교 신자였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신앙심이 강한 사람이라는 것은 전혀 알지 못 했습니다. 정치적 투쟁에 대한 얘기가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할 것이라는 저의 기대와는 달리 옥중서신의 절반은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가 그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신념을 지킬 수 있었던 것, 국민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 자신을 압제하던 이들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이 신앙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는 제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속으로는 진정 지혜로운 사람은 종교에 미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김대중 전 대통령은 어리석은 사람도 미혹된 사람도 아니었으며, 풍부한 지식과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과학에 대한 그의 생각도 저와 전혀 충돌하는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으며, 대체로 지식인들이 갖추지 못 하는 경우가 많은, 사랑과 용기를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하면 그는 제가 처음으로 깊이 존경하게 된 '한국의 기독교인'입니다. 제가 비기독교인이므로 그이 종교적인 측면은 제쳐놓고 그를 존경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모든 생각과 행동들이 기독교와, 엄밀히 말하면 예수님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예수에 대한 책을 찾아보고 생각도 많이 해보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된 것이 온전히 <옥중서신> 때문만은 아니겠지요. 그럴 만한 토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기적으로 보자면 요즘 저는 고민이 많습니다. 저는 대학원 박사과정에 지원은 해놓았지만 현재로선 백수지요. 나이는 벌써 서른인데 이루어놓은 것은 없고 아버지와 둘이 살고 있습니다. 이런 제 처지를 생각하면 불안한 마음이 들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불안해한다고 해서, 훗날의 일을 미리 걱정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자꾸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리고 사소한 일들도 저를 흔듭니다. 내일만 되면, 몇 시간만 지나면, 조금만 비켜서서 보면 별 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근심걱정을 합니다. 스스로 근심걱정을 만들기도 하지요. 그러다 조금만 상황이 바뀌어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즐거워합니다. 그야말로 일희일비하는 것이지요. 또한 제가 스스로 다짐했던 것들을 스스로 깨고, 제게 계획했던 일들이 생각대로 안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런 자신을 책망하며 마음을 다잡았다가도 금세 또 마음이 흐리멍텅해질 때가 잦지요.

'나는 어린애일 때만도 못 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는 더 나은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소중한 가치들을 가슴 속에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크면서 그런 것들을 하나둘씩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겐 남아있는 것이 얼마 없어보입니다. 저의 학벌이나 지식, 재능, 교우, 재산 같은 것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마음 속에 있었던 것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일찌감치 이것이 영혼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제가 이런 상태이기 때문에 종교적 메시지들이 강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릅니다.

좀더 장기적으로 보자면 저는 비록 종교가 없지만 그렇다고 종교 밖에서 어떤 대안을 찾지도 못 했기 때문입니다. 저를 감히 과학자라고 하기엔 부족한 점이 많지만 적어도 과학자로서 훈련을 받았고(인지 분야의 심리학 대학원에서 하는 일이 이것입니다.) 과학을 깊이 신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이 모든 문제에 해답을 준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인간의 이성을 과신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아주 오래 전부터 과학주의(인식론에서 과학의 한계를 인정하고 다른 인식방법을 허용하는 입장에 반대하여 과학적 인식을 최고위의 유일한 인식방법으로 삼는 입장)를 부정해왔습니다. 과학은 세상을 관찰하는 탁월한 방법이며, 객관적 진리를 이끌어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실존적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 합니다.

만들어진 신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리처드 도킨스 (김영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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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읽고 그 책의 서평회에도 갔습니다. 큰 반향을 일으켜서 어떤 이야기들이 있나 무척 흥미를 갖고 그 책을 읽었지만 그 책에서 다룬 종교에 대한 비판들은 대부분 저도 생각했거나 생각할 수 있었던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전 도킨스의 주장에 대부분 공감했으며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단 하나 종교가 필요없다는 것을 빼고 말이죠. 당시 서평회 강의는 장대익 교수가 맡았는데 질의 응답 시간에 저는 그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인간은 삶에 대해 궁금해하고, 의미를 찾으려는 강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호기심과 욕구는 진화론적으로도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종교가 없어진다면 과학이 과연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가?" 장 교수는 과학을 통해 우주에 만물에 대한 신비를 알아가는 황홀한 경험이 그런 욕구를 대신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대답은 불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의미에 대한 것은 전혀 언급이 없었죠. 과학주의의 입장에서 생각해봐도 1) 세상이 무의미하다는 것과 2) 인간이 의미에 대한 강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모두 과학적 사실이기 때문에, 3) 과학만으로는 인간의 욕구를 충족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인식이나 욕구의 문제를 떠나서 실존의 문제로 들어가면 더욱 더 그렇습니다. 우리는 합리적인 사고방식과 일반적인 예의범절을 바탕으로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인생에 별다른 굴곡이 없다면 그렇겠지요. 극한의 상황에 처하지 않는다면 그렇겠지요. 인생의 과제들은 주어질 것이고 때로는 그것들을 풀기가 힘겹겠지만 기본적인 도덕관과 이성으로 그것들을 해결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극한의 상황에서도 그럴까요? 아우슈비츠의 유태인까지 가지 않아도 됩니다. 허무하게 자식을 잃은 어머니, 불행한 사고로 불구가 된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거기에 어떤 해결책이 있을 수 있을까요? 또는 가족이 자신을 괴롭히거나 큰 잘못을 저지른다고 합시다. 하지만 가족이기에 그들을 완전히 내칠 수도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어느 한 도덕을 깨지 않고 해결책은 없고 마음의 괴로움만 늘어갈 것입니다. 불의한 세력이 너무 커서 도저히 맞설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하나요? 좌절만이 계속되겠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이성과 도덕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 합니다. 글쎄요, 잘 분석하면 이성과 도덕이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상황에 처한, 실존하는, 살고 있는 인간을 생각해봅시다. 과연 도움이 될까요? 책상 위에서만 효력있는 해결책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이 얘기를 꺼내니 제가 종교를 도덕의 다른 차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채셨겠죠? 저는 과학주의보다 도덕주의를 더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도덕은 중요한 가치이나 근원적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 합니다. 모두를 포용하지도 못 하지요. 그것은 그저 현실의 여러 문제들을 올바르게 풀어나갈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해주는 정도에 그치지요.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채워주지는 못 합니다. 그래서 유교의 지배가 그렇게 강했던 조선에서도 왕실에선 불교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고, 조선 후기에는 수많은 유학자들이 천주교에 귀의했습니다.

아마 종교가 그저 특정한 차원의 도덕에 불과했다면 저는 종교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수년전 신약을 읽었을 때 가장 감탄했던 건 예수가 도덕주의자들인 바리새인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많이 비판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구원이 도덕이 아니라 믿음에 기반한다는 건 정말 놀라운 것이었죠. 제가 기독교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을 때조차도 이런 점들은 위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기독교가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 종교였다면 무시했을 것입니다.

자, 이제 '종교'란 말을 그냥 '기독교'로 바꾸렵니다. 눈치채셨겠지만 현재 제 관심은 일반적인 종교가 아닌 기독교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엄밀히 말하면 '예수'에 있다고 해야할 것입니다. 솔직히 신약이 없다면 구약 따위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흠, 기독교인이 아니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걸까요? 신성모독? -_-)

사실 몇 년 전 기독교에 귀의할 뻔한 적도 있습니다. 굉장히 힘든 시기였고, 실존적 위기를 겪고 있었거든요. 근데 우연히 찾아가게(이끌려가게?) 된 곳이 성경을 상당히 보수적으로 해석하는 곳이어서 금방 돌아왔습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창세기를 하고 있더라고요. 전 진화론자거든요. 그리고 전 진화론을 포기할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위의 과학이나 도덕에 대한 생각이 제 정체성의 일부를 형성하듯이 진화론도 제 정체성의 일부입니다. 왜 기독교는 지동설을 받아들인 것처럼 진화론을 용인하지 못 하는 걸까요? 기독 신앙과 진화론이 양립할 수 없다면 전 현상태을 유지할 것입니다.

하지만 둘이 양립할 수 있다는 걸 봤죠. 일단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예가 있죠. 그는 인류의 진화를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도 믿죠. 제 랩 친구들 중에도 있었습니다. 인지랩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이 당연히 그 친구도 진화론자에 일원주의자에 저보다 더 한 환원주의자였죠. 하지만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어요.

결론은 아직 없습니다. 제가 기독교인이 됐다는 것도 아니고 될 거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축자영감설 때문에 예장(대한예수교 장로회)은 죽어도 안 되겠지만 어쩌면 감리교나 성공회나 가톨릭이 될 지도 모르죠. 아님 퀘이커? 뭐, 교파가 중요한 건 아니죠. 가장 중요한 건 예수님이니까요. 제가 이렇게까지 흔들리는 건 오직 예수님의 행적 때문입니다. 불교도 제 영혼을 채워줄(이 경우엔 비운다고 해야 적절할까요?)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기독교에 끌리게 된 건 예수님 때문이죠.

매우 길게 썼습니다. 이런 글을 쓴 건 여러분과 이 얘기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여기 승무원들이나 이곳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모두 저의 친우들입니다. 제가 요즘 무슨 생각을 하며 지내는지 털어놓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서로 만나기가 쉽지 않고, 또 이 긴 얘기를 직접 만나서 쭉 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서 여기에 썼습니다.

그리고 정말 이 얘기 꼭 하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정말 이 문제는 지금 제 가장 큰 관심사니까요. 하지만 얘기나눌 사람이 별로 없답니다. (저희 아버지는 종교를 실용적으로만 파악하시는 무신론자고, 유교에 기반한 도덕주의자입니다. 그리고 가까운 친지들도 전부 무교죠. 촌수를 좀더 멀리 가면 신부를 배출한 집안이 있을 정도로 가톨릭이 꽤 있지만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친척이지요.)

여러분의 허심탄회한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다행히 이 중에는 기독교도도 있고 비종교인도 있으니 다양한 얘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끼리 종교 문제로 다툰 적도 없으니 그런 거 걱정 안 해도 되겠죠?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1. 02:56
쓴다쓴다 하면서도 게으름 때문에 글을 못 쓰고 있었다.

1.
안의 <실종일기> 감상문을 읽고 나도 <사채꾼 우시지마>의 감상문을 쓰고 싶었다. 인생의 밑바닥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만화랄까? <실종일기>와는 달리 내용도 그림체도 명랑하지 않다. 옴니버스 형식이라 매 권 중심인물이 바뀌는데 가끔은 감정이입도 쉽지 않다. 스스로 인생을 망치고 있는 인물들도 꽤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나약함조차도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그들은 나와 전혀 다른 인간이라고 쉽사리 부정할 수만은 없다. 사악하면서도 나약하고 비겁한 인물들의 개인적 과오와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고 그 욕망을 이용해 인간성을 파괴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부조리가 만들어내는 지옥, 그것이 이 만화가 그리는 세상이다. 그 지옥 끝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자는 먼저 절망부터 경험해야 한다.



2.
요즘 기독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있다. 계기는 김대중의 <옥중서신>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신념과 독재 정권에 맞선 투쟁으로 상당 부분 채워져있을 거란 예상과는 달리 그의 서신의 반 이상은 신앙에 관한 것이었다. 핍박을 겪으면서도 그는 끊임없이 신앙을 고백하고 예수님께 의지하면서 뜻을 잃지 않았다. 사실 반독재 투쟁도 예수의 이웃 사랑을 실천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고난으로 단련된 신앙이기에 비신자인 내가 보기에도 그의 신앙은 진실되고 믿을 수 있었다. 게다가 그는 종교적으로 배타적이지 않았다. 그가 편지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의 결혼 자체가 상당히 에큐메니컬한 것이었다. (DJ는 천주교도, 이희호 여사는 개신교도이다.) 그는 여러 교파를 초월해 함께 투쟁해나가기 위해 노력했으며, 현대의 과학을 인정했으며, 비신자들을 배척하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이명박 같은 이의 기독교는 얼마나 천박한가. 그와 그를 따르는 이들은 예수가 아니라 물신을 섬기는 것이며, 그들이 스스로를 도덕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바리새인의 도덕에 불과할 것이다. 아무튼 이명박이 떨어뜨려놓은 나의 기독교에 대한 인상을 김대중이 다시 올려놓고 있다.

옥중서신. 1: 김대중이 이희호에게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김대중 (시대의창,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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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는 게 아니고, 그것이 이 책의 교훈도 아니다. 내가 정말 진지하게 생각하는 건 그러한 고통과 역경 속에서도 의지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그의 신앙 때문이었나 하는 점이다. 나는 종교인은 아니지만 인간의 이성을 과신하지 않으며 나란 사람이 얼마나 나약한가를 매일 느끼고 있다. 자신의 이성과 의지만을 믿고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며,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에 누군가에 의지한다. 그러나 우리가 의지하는 것들조차 불완전하기 그지없다. 그렇다면 절대자에 의지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신앙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것인가? (마치 우리 학교 교훈처럼 말이다.) 내 안의 어둠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된다.


3.
<자유의지, 그 환상의 진화>란 책을 읽고 있다. 아직 반밖에 못 읽었지만 내 생각과 완전히 일치하는 구절을 발견했다.

자유의지 그 환상의 진화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프란츠 M. 부케티츠 (열음사,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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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신경 생물학 및 진화에 대한 연구, 생태학과 그 밖의 다른 (생물학) 분야에서 알려준 바에 따르면, 이른바 모든 정신 상태는 신경 프로세스들에 의존해 있다. 그리고 그 프로세스들은 오랜 진화의 역사를 통해 선택되고 안정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신경 상태와 정신 상태를 '동일시하는' 것의 정당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미 오래전에, 뇌(혹은 다른 기관)에서 정신(영혼 혹은 의지)의 "본거지"를 찾는 작업은 시대에 뒤떨어진 일이라는 게 판명 났다. (인간) 뇌의 섬세한 구조에 대한 그토록 상세한 지식조차도 우리가 그곳에서 생각이나 결정이나 욕망이나 기대나 기쁨이나 근심을 인식하게 해주지 못한다. 이것들은 뇌에 "거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뇌의 특수한 특성이다. 정신 현상이란 뇌 '시스템의 특성'이라는 것이 요점인데, 이는 특정한 기관들(주족, 날개, 지느러미)의 특성이 운동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 누구도 이런 기관들에서 운동 자체를 찾아내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비유적인 의미로만 뇌가 의식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여기서 뇌와 정신의 단일성을 이야기할 때 그것이 "서로 환원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125~126쪽)

내가 인지심리학 대학원에서 동료들과 가장 많이 다투었던 철학적 문제가 바로 저것이었다. 인지심리학도들이었으므로 우리는 당연히 일원론자였다. (왜 당연한지는, 이쪽 분야 분위기를 보면 안다. 심리학의 여러 분야 중에서 가장 '하드 사이언스'를 추구한다.) 그러나 나는 일원론자이면서 환원주의자가 아니었다. 나는 당연히 인간 정신은 뇌에서 발현된다는 걸 '알지만' 뇌 연구를 통해 인간 정신의 모든 비밀을 밝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뇌에 대한 물리적, 생리화학적 연구는 인간 정신의 비밀 중 일부분만을 밝혀줄 것이다. 뇌의 구조가 아닌 상태를 찍는 fMRI를 이용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나는 어떠한 현상의 물리적 기반의 원리와 그 현상의 원리가 같다고 할 수는 없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세계는 물질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일원론자이면서 물리 현상과 정신 현상의 원리는 다를 수 있다는 이중론자이다. 이 책의 저자의 생각이 내 생각과 완전히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저 구절은 내 생각과 상당히 비슷하다고 느꼈다. 진화론에 대한 강한 긍정과 환원론에 대한 부정이 함께 담겨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
셋 다 좀 길게 쓰고 싶었는데 그냥 짧게 써서 올린다. 글 쓰는 데 너무 부담 갖다 보니 오히려 못 쓰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냥 생각나는 대로 써보았다. 다음엔 아마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를 읽은 것에 대해 쓰지 않을까 싶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 14:17
  남한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두 나라를 고르라면 북한과 미국이 꼽힐 것이다. 그리고 이분법적인 태도는 좋지 않지만 굳이 두 나라에 대한 태도를 둘로 나눈다면 친북과 반북, 친미와 반미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2 곱하기 2, 두 나라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정치적 성향을 나눈다면 친북친미, 친북반미, 반북친미, 반북반미, 이렇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두 나라에 대해 찬성 또는 반대의 입장을 취하려면 어떤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기준은 널리 받아들여질 수 있는 보편적 기준이거나, 현 상황에서 우리나라에 유익한 기준이어야 할 것이다.

  보편적 기준 중에서도 가장 보편적인 것은 황금률이다.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것. 그중에는 남을 괴롭히지 말라는 것도 포함된다. 민주주의, 자유, 평등, 인권 등 여러 가지 보편적 기준이 있을 수 있지만 뭉뚱그려 모두 황금률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이 기준에 따르면 미국이나 북한이나 낙제점이다. 미국은 비록 국내에선 비교적 이 기준을 지키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국외에선 어느 나라보다도 이 기준을 많이 어기고 있다. 대인지뢰금지협약(http://100.naver.com/100.nhn?docid=775619)을 비롯해 각종 범인류적으로 필요한 협약들에 가입하지 않고 있는 나라가 미국이다.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로 건국된 국가이며, 남미 및 후진국을 착취해가며 성장한 나라이다. 민주주의 가치의 전파에 공헌한 바가 없지는 않지만 범세계적으로 봐선 부정적 영향이 너무나 컸던 나라이다.
  북한은 어떤가? 겉보기에 이상적인 사회주의 이념을 근간으로 자주적인 국가를 설립했다. 친일파를 숙청하고 토지 개혁으로 핍박받던 농민들이 먹고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3년도 지나지 않아 전쟁을 일으켰으며 이념 수호를 명분으로 수많은 정치지도자를 숙청했다. 그후에는 사회주의 이념도 썩어문드러져 출신성분에 따라 차별하는 것이 당연해지고, 공산주의 국가는 허울에 불과하다는 듯이 잘먹고 잘사는 지도층과 굶고 헐벗는 대다수 인민들로 나누어졌다. 그리고는 자유를 갈구하는 인민들의 인권을 철저히 탄압하고 있다.
  그러므로 보편적 기준, 이상에 근거할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친북친미이다.

  하지만 정치와 외교가 항상 보편적 기준, 이상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동아시아의 조그만 나라 남한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세계 10대 무역국이라고는 하나 군사적, 외교적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기에는 주위에 강한 국가들이 너무 많다. 따라서 독자적인 활동을 하기보다는 연대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현재로서는 가장 강력한 국가인 미국과 연대하는 것이 가장 유리하다. 설사 미국에 적극적인 협력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미국을 적대시하는 것은 진정 어리석은 선택이 될 것이다. '용미'가 가장 현실적인 태도일 것이며, 굳이 이를 친미와 반미 중 하나로 분류해야 한다면 친미가 될 것이다.
  북한은 어떤가? 북한을 적대시하는 것도 남한의 이익과 평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평화를 위해서도 북한과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북한의 현 정권을 인정하고 개방을 유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점진적 개방을 통해 북한의 인권 상황을 개선하는 것이 현실적으로나 이상적으로나 가장 적절한 방안이다. 지금 북한을 비난한다면 북한은 더더욱 문을 닫을 것이며, 결과적으로 북한 인민의 생활 개선은 더더욱 요원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남한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도 북한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경제개방을 유도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북한과의 협력'이며, 이를 친북과 반북 중 하나로 분류해야 한다면 친북이 될 것이다.

  자, 이상과 현실에 따라 판단해 보았을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반북반미거나 친북친미였다. 그리고 아마도 더 이상적일 수 있는 재야세력은 반북반미가, 현실적이어야 할 정치세력은 친북친미가 주가 될 것이라고 예상해볼 수 있다. 근데 어쩐 일인가? 이 나라엔 오히려 반북친미와 친북반미가 넘치고 있다.

  반북친미의 기준은 무엇인가? 이는 사실 단순하다. 북한은 독재국가, 미국은 민주국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전쟁 때 남한의 적국은 북한이었고, 동맹국은 미국이었다는 것이다. 아주 단순하지만 비논리적인 것은 아니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기준이긴 하지만 이해하기도 쉽다. 이에 대한 반박은 있을 수 있다. 북한은 한 민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민족주의를 차치하고 본다면 반북을 이해 못 할 바도 아니다. 다만 이러한 태도가 낳을 부작용이 걱정이다. 반북친미적인 입장이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것이라는 것이다. 반북은 북한을 더욱 폐쇄적으로 만들어 북한 인민의 생활을 악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지나친 친미적 태도로 인해 실제 미국이 저질렀거나 저지르고 있는 악행들조차도 덮어질 우려가 있다. 따라서 반북친미는 상당히 유아적이고 근시안적인 태도이다.

  그렇다면 친북반미는 어떤가? 솔직히 이런 태도는 쉽게 이해하기 힘들고 정신적으로 매우 뒤틀려 있는 태도라 할 수 있다. 미국의 악행이 아무리 크다 해도 미국만 반대하고 북한만 편들기에는 북한의 악행도 만만치 않다. 적어도 미국은 자국민을 이렇게 학대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그렇지만 남한의 지도자들도 역시 같은 민족이다. 친북반미를 외치는 사람들은 남한의 지도자들에 대해선 극히 비판적이면서 북한의 지도자들에게는 매우 관대한 잣대를 갖다댄다. 이는 이중잣대가 아닌가? 가끔 이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나라는 미국이 아닌가하는 아이러니한 생각도 드는데, 왜냐면 미국에 가장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지고의 정신적 사랑이라면,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이 더 도덕적이길 원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보다는 가까운 대상에 대해 더 잘 알기 때문에 더 비판적일 수 있다는 것이 맞는 해석일 것 같다. 그러므로 가장 가까운 남한 정부, 그 다음인 미국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 정부에 대해 우호적인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예를 들면 이승만과 김일성에 대한 태도를 비교할 수 있다. 친북반미적 태도를 가진 사람들은 이승만에 대해선 극도로 비판적이지만 김일성에 대해선 우호적이거나 중립적이다. 하지만 둘 다 독립운동가였고 독재자였다. 둘 모두 공과를 얘기해야 하지 않을까? 이승만과 김일성을 미국과 북한으로 바꿔 놓아도 마찬가지이다. 친북반미의 가장 큰 문제는 어떤 역사적 문제를 다루든 드러나는 이중잣대이다.

  나는 북한과 미국에 대한 논쟁이 친북친미와 반북반미의 논쟁이 되길 바란다. 그 논쟁이 합리적인 토론으로 발전된다면 이상과 현실 사이의 조화지점을 찾는 유익한 논의가 될 것이다. 하지만 현 상황은 반북친미와 친북반미의 논쟁이다. 이 두 입장은 모두 심각한 오류를 안고 있는데다, 양측 모두 상당히 교조주의적이라는 점에서 발전적인 논의는 요원해보인다. 매우 안타까운 상황이다. 그리고 더 안타까운 점은 이들의 힘싸움 때문에 합리적인 친북친미, 반북반미 세력이 잊혀질 것 같다는 점이다.
  남한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힘있는 친북친미주의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그는 집권 기간 중 형식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친북친미정책을 추진했고, 미 클린턴 집권 시절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이가 노무현이었는데 그는 실질적으로 친북친미 정책을 추진했으나 형식적인 측면에서 친북반미로 오해를 살 만한 일이 많아 그 효과가 반감되었다. 이제 둘 다 세상을 떠난 지금 정치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친북친미 정책을 주도적으로 펴나갈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

  합리적인 진보세력이라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지를 이어야 한다. 그러나 과연 진보세력 중에 그런 세력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회의가 깊다. 상당수의 진보세력은 친북친미라기보다는 친북반미에 가깝다. 미국을 비판하는 것은 좋지만 가끔 그들의 이중잣대는 짜증날 정도다. 상당히 유명한 책인 <대한민국사>(한홍구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1권을 보자.

두 형제가 있었다. 한 쪽은 체면에 구애받지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었다. 다른 한 쪽은 자존심과 체면을 중시하면서 가난하게 살았다.

  당연히 전자는 남한, 후자는 북한이다. 북한을 마치 절개 높은 선비가 벼슬에 나가지 않아 고난을 감내한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 아무리 좋게 보아줘도 북한을 그냥 '자존심과 체면을 중시'해서 어쩔 수 없이 가난하게 산 나라로 보아줄 수 있는가? 이 책에는 저런 식의 표현이 비일비재한데 이중잣대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진중권, 우석훈 등 진보주의자들의 책을 많이 읽었지만 <대한민국사>를 읽고서는 상당한 불쾌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진보의 대표로 여겨지고 있으며, 반북친미 세력만큼이나 친북친미가 설 자리를 좁히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6.15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인가. 나는 적어도 죽기 전에는 통일이 된 세상을 보고 싶다. 그리고 그 전에 우선 꼴통 반북친미주의자와 교조적 친북반미주의자들이 힘을 잃고, 현실과 이상의 합리적 조화를 논하는 세상이 와야 할 것이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0. 7. 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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