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을 비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2pm 재범의 글은 사실 별 거 아니다. 사전에는 꽤 살벌한 표현들로 번역돼있지만 실제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쓰일 때의 느낌은 까대는 정도의 느낌이다. 내 외국인 친구도 나랑 놀면서 종종 "You're gay.", "So gay."란 표현을 쓰곤 하는데, "짜증나."정도의 느낌이다. 단어가 쓰이는 문화적 배경 및 뉘앙스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번역해서 빚어진 오해라고 생각된다. 오역의 문제는 기사에서도 지적되었다.(http://spn.edaily.co.kr/entertain/newsRead.asp?sub_cd=EA21&newsid=01111926589818480&DirCode=0010201)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설사 오역이 아니었다해도 이게 한 젊은이의 앞길을 가로막고, 고국을 떠나게 만들 정도의 일이냐는 것이다. 4년 전 연습생 시절 마이스페이스에서 친구와 나눴던 사적인 대화일 뿐이다. 사생활 침해라는 측면에서 잘못은 재범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확대 재생산한 언론과 네티즌들에게 있다. 그리고 한국을 비하하든 모욕하든 그건 죄가 아니다. 더군다나 그냥 까대고 짜증낸 정도다. 우린 대한민국에 대해 항상 좋은 얘기만 해야 하나? 그렇담 아마 나부터 이 나라를 떠야 할 것이다.
 
대통령 욕 좀 했다고 잡아가던 유신 시절의 행태는 공포였지만, 이건 공포+코미디다. 무슨 대한민국의 국체를 손상당한양 입에 거품을 물고 비난하는 꼴이라니. 대체 이런 짓을 하는 네티즌들의 정체란 무엇일까? 그리고 그런 여론몰이를 한 언론들은 일말의 책임이라도 느낄까?

2. 재범이 좀더 강단이 있었다면 계속 한국에서 활동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 광풍은 잦아들었을 것이다. 네티즌들 사이에서도 반성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성은 감정보다 늦게 발동되기 마련이다. 조금 시간을 갖고 기다려봤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다른 연예인들이 생각난다. 문희준은 특별한 잘못도 없이 수 년동안 전국민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에 굴하지 않고 꾸준히 자기 길을 갔다. 수년의 광풍도 결국 잦아들었다. 재범에 대한 광풍은 더 짧았을 텐데 아쉽다.
신해철이 이런 경우를 당했다면 오히려 네티즌들을 비난했을 것이다. 그는 대중에 아부하는 연예인이 아니다. 그의 말이 옳든 그르든 대중의 인기에 무조건 종속되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는 특별한 연예인이다. 재범도 좀더 당당했으면 어땠을까? 아이돌 가수에게 그런 걸 기대하는 건 무리일까?

3. JYP에 대해선 별로 옹호하고 싶지 않다. 언론 플레이를 가장 많이 하던 JYP가 이번엔 되레 언론 플레이에 당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비'가 미국진출을 하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원더걸스'도 그 뒤를 이으면서, JYP의 언론플레이는 눈꼴실 정도였다. 한국언론에 떠들려고 미국진출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시시껄렁한 것들을 기사화하며 허상을 실체인양 떠벌렸다. 이번엔 오히려 당했다.

재범과 더불어 박진영도 사과문을 올리는 등의 대처를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과연 이번 사태에서 JYP가 소속사 연예인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는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연애 문제까지 관리해가며 소속 연예인에 대해 무한한 권력을 행사하는 소속사들이 정작 소속 연예인이 힘든 일을 겪을 때는 별 도움을 주지 못 하는 것처럼 보여 씁쓸하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9. 9. 12:01
  언어는 사고와 감정을 고스란히 담을 수 없다. 그래서 시인들은 언어를 다듬었다. 그리고 다듬는 것으로 모자라 뒤집고 쪼개고 합치고 비틀어버리곤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표현하기 위해. 그리고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이 주인과 손님의 자리를 바꾸었다. 그렇게 심상과 시어는 자의적이고 부조리한 관계를 드러낸다.

  일반적으로 시니피에는 개념, 시니피앙은 시니피에를 드러내기 위한 물리적 표현이지만, 둘의 관계를 표현되는 것과 표현 매체로 본다면 언어 내에서도 그 관계를 찾아볼 수 있다.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를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둘의 관계는 자의적이며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한글은 자모가 음성기관을 본떠 만들어졌으므로 그 관계가 자의적이진 않다. 'ㄱ'은 'ㄱ'소리를 낼 때 혀뒤가 연구개에 닿는 모습을 본떠 만든 글자이며, 'ㄴ'은 'ㄴ'소리를 낼 때 혀끝이 윗잇몸뒤에 가닿는 모습을 본떠 만든 글자이다. 그러므로 전세계 글자 중에 가장 음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글자라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이 한국어의 음성을 정확하게 표기하지는 못 한다.

  한글로 표현할 수 없는 음성으로 국어학 서적에 예시로 나오는 단어로 '영등포'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영등포'의 '여'를 '반모음 ㅣ'+'ㅡ'로 발음한다. 이렇게 발음하지 않는 사람들도 발음해보라고 하면 쉽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반모음 ㅣ'+'ㅡ'에 해당하는 글자가 한글에는 없다.

  위 발음은 근래에 자주 쓰이는 발음이 아니고 일종의 변이음으로 볼 수 있으므로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거의 모든 표준어 화자의 말에 드러나고 있는데 한글로 표기할 수 없는 발음이 있다. 이는 변이음으로 보기도 힘들고 음소의 지위를 획득한 것으로 보이는데도 한글로 표기할 수 없다. 무엇일까?

  "걔가 걔랑 사귀어?"
  "지금은 아니야. 그새 또 바뀌었어."

  '사귀어'의 '귀어'는 두 음절로 발음되지 않고 한 음절로 발음된다. '바뀌어'의 '뀌어'도 마찬가지다. '반모음 ㅟ'+'ㅓ'로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아까 '영등포'의 경우와 달리 이 발음은 대부분의 한국어 화자에게 나타난다. 게다가 명백히 두 음절이 아니라 한 음절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발음을 한 음절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래서 어쩔 수 없어 '사귀어', '바뀌어'로 쓰고 있는 것이다.

  글자를 만들어야 할까? 그렇다면 해결방법은 '영등포'보단 쉽다. 'ㅣ'와 'ㅡ'를 합친 글자를 생각해내는 건 쉽지 않지만('ㅢ'는 이미 다른 음가를 나타내는 글자로 쓰이고 있다.), 'ㅟ'와 'ㅓ'를 합친 글자를 생각해내기는 쉽다. 'ㅝ'를 만들 때처럼 'ㅜ'옆에 'ㅕ'를 붙이면 된다. 이 발음이 계속 쓰이면 언젠가는 저런 글자가 만들어질까?

  아마 이 발음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는 없었던 것 같다. 현실발음으로 쓰였다면 중국어를 표현할 글자까지 만들 정도로 꼼꼼했던 세종대왕이 놓쳤을 리가 없다. 현대에 들어와 새로 생긴 것일까? 단모음 'ㅚ'와 'ㅟ'가 없어져 가는 상황에 반모음으로 'ㅟ'가 자주 쓰이게 되는 역설적인 상황이 무척 흥미롭다. 어쩌면 너무나 빠르게 '바뀌어가고', 너무나 자주 '사귀었다' 헤어지는 현실을 반영하는 건 아닐까?

*마지막 문장은 세태가 각박해지면서 된소리가 늘었다는 주장만큼이나 비과학적인 생각이니 농으로 듣고 넘기시길.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9. 1. 16:20
“잘 오셨습니다! 우리는 거의 언제나 우리말만 쓰지요. 숲 깊은 곳에 살기 때문에 외부인들과는 거의 접촉하는 일이 없거든요. 북부의 요정들과도 거의 연락이 끊긴 상태랍니다. 하지만 우리 중 일부는 바깥으로 나가서 새 소식을 듣거나 적의 움직임을 감시하기도 하기 때문에 외부의 언어를 좀 알지요. 나도 그 중 하납니다. 난 할디르라고 합니다. 여기 있는 내 동생 루밀과 오로핀은 당신들 말을 거의 모릅니다. (......)”

씨앗판『반지의 제왕』제2권 반지원정대(하) 200~201쪽


  반지의 제왕에서 로스로리엔의 요정 할디르가 반지원정대에 건네는 인사말이다. 여기서 할디르가 사용하는 말은 소위 ‘공용어’이고, 할디르가 ‘우리말’이라고 하는 것은 요정들의 말인 ‘신다린’이다. 할디르는 아마 ‘퀘냐’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뭐냐고? 또다른 요정어이다. 바다 건너 요정들의 땅에 살 때 요정들의 말은 원래 퀘냐였다. 그곳에서 일군의 요정들이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서 그들의 말은 원래의 말과 달라지기 시작해 신다린이라고 하는 다른 언어가 되었다. 둘은 친족 관계에 있는 언어이지만 다른 언어이다.

반지의 제왕 세트 (전7권)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J. R. R. 톨킨 (씨앗을뿌리는사람,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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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들의 말도 다르다. 위대한 제국을 건설했던 누메노르인들의 말인 아두나이어가 전 대륙에 걸쳐 공용어로 쓰이고 있지만, 말들의 나라 로한에서는 그들 조상의 말이 쓰인다. 그리고 드루아단 삼림지나 던랜드에 사는 인간들 역시 다른 말을 사용한다. 그리고 난쟁이, 엔트, 오르크들도 자신만의 언어가 있었다.

  반지의 제왕의 언어적 풍부함은 단지 종족의 차이나 공간의 차이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차이로도 드러난다.

“L (......) 무성음일 경우(보통 첫 글자 sl-에서 파생된 경우)에는 LH로 이 음가를 표시한다. 퀘냐의 고어에서 이 음의 철자는 hl이었지만, 제3시대에 보통 l로 발음했다.”

“TY (......) 이 철자는 주로 c 또는 t + y에서 파생된 것이다. 서부어에서 빈번하게 찾아 볼 수 있던 이 음가가 영어의 ch 음가로 대체되었다.”

“엘다르 언어의 초기 단계에서 특히 선호된 ng, nd, mb 같은 자음의 조합은 신다르어에서 다양한 변화를 겪었다.”

“당대의 언어 가운데 유독 신다린만이 프랑스어 lune(륀)의 u와 다소 비슷하게 ‘움라우트 현상으로 변이된’ 전설음 u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일부는 o와 u가 음운 변화를 일으킨 것이었으며, 부분적으로는 예전의 이중모음 eu, iu에서 파생된 것이었다.”

  『반지의 제왕부록 E에서 언어 변화와 관련해 눈에 띄는 부분들만 발췌한 것이다. 톨킨은 이 정도로 정교하고 살아있는 언어를 만들어냈다. 소설 하나를 위해 거의 완벽한 새 언어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실 톨킨은 언어를 위해 소설을 썼다. 그는 새로운 언어, 특히 엘다르어(요정어)를 만드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리고 언어는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언어를 위해 역사를,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보통의 판타지 소설가라면 언어 문제를 회피하거나 단순화할 것이다.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에선 국가마다 언어가 다르긴 하지만 방언은 없다. 방언이 뭔지도 모르는 후치 네드발에게 칼 헬턴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바로 그걸 말하고 싶었다네. 마법사들은 엄청나게 떨어진 거리에서도 얼마든지 말을 주고받을 수 있다네. 성직자들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마법사들이나 성직자들은 대개 학문적으로나 뭐로나 문화를 이끌어나가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지. 그래서 우리 나라엔 방언이 없다네. 하지만 마법이 발달되기 전에는 그런 방언 같은 것이 있었다고 하네. 루트에리노 대왕의 전기만 읽어보아도 그런 방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드래곤 라자』제8장 인간의 무기 중

드래곤 라자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이영도 (황금가지,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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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신 수단의 발달이 지역 간 언어의 차이를 없앤다는 건 타당성이 있는 주장이지만 그것만으로 방언이 쉽게 없어지진 않는다. <드래곤 라자>의 세계보다 훨씬 통신이 발달한 현대에도 방언은 없어지지 않았다. 언어 문제를 회피하려고 한 작가의 장치가 아니었나 싶다.

  후기작인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이영도가 언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좀 더 정교해진다. 인간들이 사는 북부에서 나가들이 사는 남부까지 하나의 언어가 통용되는 현실에는 신학적인 설명이 동원된다. 그리고 고대어가 등장하고 실제로 그 고대어로 말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즉 시공간축에서의 언어 변화의 가능성을 인지하고, 소설 속에서 설명하고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눈물을 마시는 새 세트(전4권)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이영도 (황금가지,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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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앤 맥카프리의 <퍼언 연대기>에선 언어 문제가 간단히 무시된다. 우선 방언은 존재하지 않는데 인간들이 사는 ‘퍼언’이 그리 넓지 않은 지역이라는 점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400년 전의 사람들을 시공간 이동을 통해 불러오는데 그들과 아무런 불편 없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건 좀 무리한 설정이 아닌가싶다. 4세기 전의 모국어란 친족 관계에 있는 외국어와 다름없다. 우린 100년 전의 기록을 읽을 때도 꽤 불편을 겪지 않는가?

퍼언 연대기 세트 (전3권)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앤 맥카프리 (북스피어,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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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타지 소설에서 <반지의 제왕>이나 실제 현실만큼의 언어적 정교성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뿐더러 불필요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소설이 사실성-판타지나 SF에서도 사실성은 중요하다. 그것은 현실과 똑같다는 의미에서의 사실성이 아니라 얼마나 타당하고 그럴듯한가라는 의미의 사실성이다.-을 획득하기 위해선 언어의 차이나 변화에 대해 무시해선 안 될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실제 세계의 언어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고 있지 못 하다는 것이다. 각 언어 간, 각 방언 간에는 얼마만큼의 차이가 있는가? 촘스키의 주장처럼 모든 언어에 공통되는 보편 문법이란 게 있는 것일까? 언어 변화는 얼마나 빠르게 진행되는 것일까? 방언은 얼마나 세월이 지나야 다른 언어가 되는가?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기 시작한 근대 들어서 언어 변화의 속도는 더 빨라진 걸까?

 
상상 속 세계라는 렌즈로 실제 세계를 들여다보며 이런 질문들을 던져본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8. 18. 19:57

  “난 자장면이야.”

  이 문장은 매우 독특하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나=자장면”이 된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위 문장이 쓰이는 경우 그 뜻은 “난 자장면이 좋아.”나 “난 자장면으로 할래.”이다. “난 소주.”, “난 커피 말고 녹차.”같은 문장도 그렇다. 고종석 씨는 그의 책『국어의 풍경들』에서 이런 식으로 표면적 비논리성을 띄는 문장들을 ‘자장면 문장’이란 이름으로 묶어 지칭했다. 일본어에서는 이러한 문장을 ‘장어(うなぎ) 문장’이라고 한다. 장어를 시킬 때 “나는 장어다(ぼくはうなぎだ).”라고들 하기 때문이다. 가장 전형적이고 흔한 쓰임이 무리를 대표하게 된 것이다.

국어의 풍경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고종석 (문학과지성사,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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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자장면’은 표준어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대표이기도 하다. 맨 위의 문장을 ‘문자 그대로’ 보면 논리적으로 틀리기 이전에 현실적으로 틀렸다. ‘나=자장면’일 수도 없지만 ‘내가 먹으려는 것=자장면’일 수도 없다. 우리가 먹는 것은 ‘짜장면’이기 때문이다. 나는 ‘자장면’을 시키는 사람이나 ‘자장면’이라고 쓰인 메뉴판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자장면’은 오직 방송에서만 쓰이는 죽은 말이다. 아마 아나운서들도 주문할 때는 ‘짜장면’이라고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장면’ 표기에 불만을 품고 오래 전부터 문제를 제기해 왔지만 여전히 바뀌지 않고 있다. 표준어란 이토록 뻣뻣한 것일까? 문교부의 1998년 1월 19일 고시에 따르면 “표준어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이다. 이 총칙에 비춰 보면 ‘짜장면’은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이니 충분히 표준어의 자격을 갖추고 있다. 국립국어원이 조금만 융통성을 발휘한다면 충분히 고쳐질 수 있을 것이다.

  표준어의 진짜 문제는 총칙을 준수하고도 고칠 수 있는 ‘자장면’ 같은 낱말에 있는 게 아니다. 총칙에 드러나 있는 편협함, ‘교양 있는’ ‘서울말’이 문제다.

  방언은 의사소통의 장애가 되기도 하지만 언어를 풍부하게 해주는 구실도 한다. 특히 방언 어휘는 다양한 역사와 문화의 보고이다. 지역 방언은 해당 지역의 삶의 결을 보여준다. ‘정지’는 ‘부엌’의 사투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정지’라고 말할 때의 가옥 구조는 ‘부엌’과는 미묘하게 다르다. 농촌, 어촌, 산촌에는 각각 농업, 어업, 임업과 관련된 수많은 방언 어휘들이 존재한다. 그 방언 어휘들을 서울말에 대응시키면, 마치 ‘벼, 쌀, 밥, 메’를 ‘rice’에 대응시킬 때처럼 차이가 뭉개져버린다. 이런 수많은 말들이 단지 ‘교양 있는 서울말’이 아니라는 이유로 방송과 사전에서 외면당하고 있다.

  전 국립국어원장이었던 이상규 선생은 『둥지 밖의 언어』에서 이런 현실을 개탄하며, “언어의 다양성이 생겨나는 과정이나 그것을 유지하는 힘은 편협한 언어 정책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157ㅉ)고 말하고 있다.

이상규: 둥지 밖의 언어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이상규 (생각의나무,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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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어가 공용어 화자수로 세계 14위이긴 하지만 영어에 비하면 20분의 1도 되지 않는다. 공룡 언어들에 치여 많은 소수 언어들이 소멸하거나 힘을 잃어가고 있는데 한국어도 그런 처지에 처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거대 언어의 파고 속에서 소수 언어들이 자신을 지키는 명분은 다양성의 유지이다. 생태계의 다양성만큼이나 문화의 다양성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화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언어야말로 일차적으로 보존되어야 할 문화 유산이다. 문화 변방국으로서 문화 다양성의 보존을 외쳐야 할 처지의 한국이 도리어 문화 다양성을 파괴하는 언어 정책을 취한다면 아이러니일 수밖에 없다. 한국의 언어와 문화를 풍부하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한국어를 보존하기 위해 우리의 표준어 규정을 바꾸어야 한다.

  매체의 발달로 이미 전국에서 표준어가 쓰이고 있는 지금 굳이 표준어를 서울말로 한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교양 있는’이란 모호한 수식도 없애는 것이 좋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부 영역 이외에서 표준어 사용을 강제하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언론에서도 표준어만 써야할 필요는 없다. 방언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지역 방송이나 신문에서 그 지역의 방언을 사용한다면 지역 주민들에게 더욱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고, 지역 주민들의 지역 언론에 대한 애착도 강해질 것이다. 사전편찬자들도 그 동안 외면했던 지역 방언과 사회 방언의 어휘들도 사전에 싣기 시작할 것이며, 그러면서 그 문화들이 보존됨은 물론, 주류 문화와의 소통도 가능해질 것이다.

  이런 변화가 한국어의 규범을 무너뜨릴 것이라는 우려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자장면’같은 단어를 쓰며 강박적으로 표준어에 집착하는 방송에서도 부정확한 표현이나 잘못된 표기가 남발되고 있다. 언어 규범을 세우기 위한 노력은 표준어와는 별개로 이루어져야 하며, 엄밀히 말해 이는 표준어보다는 맞춤법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맞춤법에 대해서는 후에 다른 글에서 논하게 될 것이다.

  언어 다양성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가졌던 분이 국립국어원장을 지냈는데도 언어 정책이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아 안타깝다. 한 개인보다는 기관이, 일개 기관보다는 권위주의적이고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정부의 힘이 더 셌던 것일까? 아예 표준어를 없애는 것이 어떨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8. 10.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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