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에는 산딸기 주스 언덕에서

이번에는 키위 주스 언덕에서 쉬며 당신을 생각해요

 

몸은 좀 어때요? 괜찮은가요? 잘 잤나요?

비가 와서 삭신이 쑤시지는 않나요?

어제는 비가 세차게 내렸는데 오늘은 날씨가 맑아졌어요

이런 날에는 당신을 만났어야 했는데

어제는 당신 생각에 밤에 잠도 못 이루었답니다

 

자다 깨면 당신 모습이 저 멀리 날아갈 것 같아서

손아귀에 쥐고 있던 당신 얼굴이 없어질 것 같아서

맛있는 생선을 뺏기기 싫은 고양이의 마음으로

여기 이렇게 이 자리를 떠나지 않았답니다

, 기특하죠?

 

다정하고 알뜰한 당신

미쁘고 아름다운 당신

아무 이유 없이 꽃다발 한 아름 안겨주고 싶은 당신

그래요, 거기 계속 계세요

 

세상 모든 것이 변하지만 내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약속은 하지 않을래요

나는 변액 보장 보험이 아니니까요

저기 저 화장실에 누군가 써 놓은 낙서보다

가로수에 새겨놓은 하트표시보다

내 맹세가 오래갈 자신이 없거든요

 

내가 당신께 보여드릴 수 있는 것은

숙제를 잘 해오는 모범생 어린아이가 갖고 있는

성실함과 꾸준함, 그리고 얼마간의 생색 뿐

 

, 잘했죠?

당신 옆에 지금 있는 것

당신만 바라보는 것

영원보다 개근을 약속하는 것

모두 다 잘했죠?

 

상큼하고 시큼한 키위 같은 하루가 저물며

뿌듯한 자신을 주체할 수 없어

휴일의 끝자락, 닿고 싶은 당신에게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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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10. 28. 17:03

  오빠, 우리 처음 사랑은행에 왔던 거 기억나? 쭈뼛쭈뼛한 모습으로 만난 우리. 그 어색함을 감당할 길이 없었잖아. 우리는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 안에서 숨 쉬고 있었지만 서로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지. 그래서 오빠가 그랬잖아.

  “승혜 씨, 이렇게 만나게 되어 정말 기뻐요. 하지만 저희 이제 두 번 만났는데 서로에 대한 마음이 너무 작은 건 당연한 거겠죠? 저도 그렇고 승혜 씨도…….”

  “, 저도 그렇지만 오빠도 나이가 좀 되잖아요. 지금까지는 오빠를 보면 편하고 나쁘지 않은 감정이 이는 건 사실이지만, 서로가 서로의 100% 인연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이 사람이다, 하는 확신. 행복한 사랑. 든든한 미래. 서로를 의지하는 마음. 그런 감정 쉽게 오는 게 아니잖아요.”

  “, 승혜 씨.”

  오빠는 일단 이런 여운을 남겼지. 그래서 난 이게 무슨 영문인지 몰랐어.

  그리고 며칠 후였지? 우리 회사가 있는 여의도로 점심 때 오빠가 찾아와서는 다짜고짜 나를 은행으로 끌고 갔었어. ‘사랑은행 여의도지점이라는 간판이 있는 건물로.

  “은행이 점심 때 아니면 문을 닫잖아요. 그래서 지금 승혜 씨를 모시고 왔습니다.”

  오빠는 익숙한 솜씨로 번호표를 뽑았어. 하긴, 번호표를 뽑는데 익숙하고 덜 익숙하고가 어디 있겠느냐마는.

  은행은 평일인데도 사람이 꽤 많았어. 우리가 뽑은 156. 앞으로 열 명이나 더 기다려야 하네. 난 운동을 많이 해서 실한 덩치를 소유한 오빠 어깨에 기대보았어. 이제 세 번 만난 남자였지만, 그래도 남에게 소개할 때는 내 남자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오빠의 어깨에. 그리고는 스르르 눈이 감겼어. 일이 많았는데 아직 점심도 먹기 전이라 좀 피곤했나봐. 오빠 어깨는 좀 따뜻했어. 사람이니까 온기가 있는 게 당연하겠지만, 그 온기에 내 경계심도 어느 정도는 누그러지는 듯 했어.

  156번 고객님, 2번 창구로 오십시오.

  “승혜 씨.”

  우리 차례를 알리는 둔탁한 기계음과 내 귀에 작게 내 이름을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지. 정동호라는 이 남자. 나는, 아니 오빠랑 나는, 창구로 가서 앉았지.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오래 기다리셨죠?”

  근데 이 오빠 벌써 나랑 데이트비 통장을 만들려고 하나? 난 그래도 남자가 밥을 사면 차를 사는 정도의 매너는 갖고 있는 여잔데. 굳이 이런 거 귀찮게 왜 만들려고 하지?

  “, 자유마음적립적금을 만들려고 하는데요.”

  “, 고객님. 처음 오셨죠?”

  “.”

  “그럼 여기에 성함과 주민번호를 써주시고요, 성함 옆에 싸인 해주세요. 같이 오신 고객님도 써주세요.”

  나는 맛있는 브런치를 이 남자한테 대접받는 대신, 딱딱한 은행 텔러의 도움을 받아 은행업무를 보고 있었지. 이때까지만 해도 그냥 이 적금도 일반 적금이랑 똑같은 건 줄 알고 말야. 배는 고프지만 오빠가 날 먹을 거만 밝히는 식충이로 알까봐 아무 얘기도 못하고 있었어.

  난 익숙한 솜씨로 삐뚤빼뚤한 글씨로 내 이름 석 자를 적고 멋들어진 사인을 했지. 오빠랑 내가 기재한 예금 원장을 텔러에게 내밀고는 잠깐 기다리고 있었어.

  “고객님, 먼저 입금할 마음 한 조각을 주세요.”

  텔러의 말을 듣고도 나는 이해할 수 없었어. 얘가 나랑 장난치나? 나보다 몇 살은 어려보이는 여자애가. 그래서 난 본능적으로 되물었나봐.

  “?”

  “마음이요, 마음.”

  오빠는 어느새 자기 머리카락을 하나 뽑아서는 직원에게 내밀고 있었지.

  “, 승혜 씨도 머리카락 하나만 주세요. 제가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한데, 머리카락 한 올이면 충분한 마음이 입금될 거예요.”

  나는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우리 뒤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후 번호표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고, 그까짓 머리카락 한 올이 대수랴, 는 생각에 내 가방에서 족집게를 하나 꺼내서 뒷머리카락을 하나 뽑았어. 난 스트레스가 많은 직장인이지만 아직 탈모가 오지 않았다는 데 안도하면서.

  “가입 다 되었습니다. 기간은 3, 이율은 10%고요. 중간 중간에 예쁜 마음, 고운 마음, 아끼는 마음 등을 자유로 입금하시면 만기가 될 때 더 큰 사랑의 마음으로 돌아올 겁니다.”

 “.”

  오빠는 익숙한 듯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어.

  “, 기간이 되지 않았는데 해지는 되도록 하지 말아주세요. 저희가 혜택을 크게 드리는 만큼 중도 해지는 위험하니까요. 중도 해지하시면 생살을 도려내는 듯 아플 겁니다. 서로의 마음이요.”

  “, 알겠습니다.”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어. 나는 오빠한테 물었어.

  “오빠. 왜 나한테 말도 없이 여길 왔어요? 아직 난 마음을 맡길 아무 준비도 안 되었는데.”

  좀 유치하지만 나는 뮤지컬에나 나올 대사를 오빠한테 읊어댔지. 이 남자, 과감함을 넘어 무모해보여서.

  그래, 사랑은행이란 거 나도 얼마전에 뉴스로 듣긴 했어. 사랑을 확신할 수 없는 커플이 마음을 맡기거나 적립시키면 만기가 지나서 이자가 붙는다는 걸. 이자와 원금을 포함하여 커다란 마음이 되어 죽고 못 사는 관계가 된다는 걸. 하지만 중도 해지하면 그 마음은 산산이 쪼개져 아파온다는 걸. 그 마음을 도저히 수습할 수 없다는 걸…….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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