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직장으로 옮기고 일주일이 흘렀다. 난 출퇴근길에 읽을 책 두 권을 한 글자도 보지 못했다. 시간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여유가 없었다. 달콤하고 허무한 황경신의 소설과 두루뭉수리한 듯 핵심을 찌르는 이충걸의 인터뷰집은 가방 속에서만 뒹굴거리고 있었다.

  나는 이 직장에 동대문시장 소속 상우회 회원으로 입회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회사에 가입함과 동시에 나는 이 회사에 몰아치는 광풍과 왁자지껄한 소음을 온몸으로 맞이해야만 했다. 회사는 예수회 소속 수도사를 비웃기라도 하듯 5일장만큼이나 북적거렸다.아직 채용계약서의 잉크도 뿌리지 않은, 이 회사에 투신하기를 주저하는 나를 온갖 행정, 막노동 잡부로 부리기 시작했다. 팀장과 그를 위시한 팀원들은 돌잔치를 끝나고 받는 돌떡처럼 넉넉한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나는 아직 부끄러운 생각에 그 사람들의 눈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나는 내 몸을 돌보기도 바쁜, 가정관리사를 거느리는 행위는 꿈도 못 꿀 연약한 소시민이니까. 나는 줄곧 이곳에서 이성을 잃고 매뉴얼과 자료를 보는 척하고 있었다. 또 흑색 수트를 입은 한 사내가 멀쩡한 내 정신 대신 내 몸뚱이를 활용하여 바쁜 선배들의 전화를 대신 받아주었다. 난 신입사원의 잡다한 프로그램을 한 번에 익힌 능숙한 주방보조가 되기를 강요받고 있었다.

  "영진 님은 블라블라블라. 영진 님은 블라블라블라. ^^;;;;;;"

  깔깔깔 호호호 헤헤헤 흐흐흐 감사합니다 누구입니다, 하는 시끄러운 잡음들 속에 나는 시청 광장에서 이 팀 직원들을 앞에 놓고 발가벗겨지기를 강요받고 있었다.

  나는 어쩌면 이 곳에 잘못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잘못된 호출을 받고 모인 지원자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사실은 없는 행사의 지원자. 왜 난 항상 잘못된 곳에 홀로 방치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 그래도 내 입꼬리는 항상 사람들을 향해 미소지어야만 했다. 너무 굳어있으면 아마추어 모델 같으니까.

  하지만 쇼는 통하지 않았다.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하고 우물쭈물하는 열두 살 짜리 꼬마처럼, 나는 이 순간이 밥을 먹을 때인지, 이 순간이 화장실에 갈 때인지, 이 순간이 사수에게 어떤 말을 할 때인지 알아차리지 못한 채 발만 동동 굴러야만 했다. 난 차라리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에게 고백했다가 차인 남자이고 싶었다. 그래도 그 남자는 용기있는 행동에 박수받을 거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육년 간의 직장생활로 다져진 고도화된 눈치싸움 밖에 없었다. 허허거리고, 뛰어다니고, 말은 가려야만 하고, 이런 일이 똥 된장을 구분못하는 사람의 일과인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일하는 노동자처럼 여유없는 일상 속에, 나는 안톤 체홉이나 요한 세바스찬 바흐나 까르띠에 브레송이나, 무라카미 하루키 등은 한 글자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야근과 주말근무가 일상화된 이 클리닉은 안 그래도 비루한 개인 생활을 저당잡힐 수밖에 없어서 괴롭지만, 난 나의 부족한 연봉을 도둑질 빼고 어떤 짓을 해서라도 메워야만 했다.

  낡은 앤티크처럼 지루한 명제. 왜 끝이 있으면 시작도 있다는 말은 종일 내 릴 위를 맴돌고 있을까. 게다가 그 시작이라는 건 왜 유독 내게만 빨리 찾아오는 걸까.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오래된 검정 가방을 흔들거리며 앤티크 같은 삼청동 아래를 내려가고 있었다. 길어진 밤은 종일 그 자리에 있었고, 나는 이 자리에서 저 자리를 비행하듯 자취를 그리고 있었다. 원 밖을 벗어나지 못한 채로, 그 자취는 계속 출근과 퇴근이라는 이름으로 같은 선만을 그리고 있었다.

'김 - 랜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휘파람(오투잼 아날로그 중).  (0) 2012.10.21
[습작]즉흥 28-1(사랑은행).  (0) 2012.10.14
[습작]즉흥 27-1.  (0) 2012.10.13
생각 61.  (0) 2012.10.05
[즉흥]습작 26.  (0) 2012.10.04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10. 13. 14: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