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이 있은 후로, 그러니까 사랑은행에 우리 명의의 적립적금을 넣은 후로, 어찌된 일인지 오빠는 나에게 좀 이상해졌어. 이상하다는 말은 철저하게 주관적인 말이잖아. 왜냐하면 우리를 본 다른 사람들은 우리 관계에 대해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때가 되면, 즉 내가 생일이 되거나 만난 지 백일, 이백 일 이럴 때 선물을 해주고, 맛있는 것도 먹고 어딘가로 놀러가기도 했으니까 말이야. 정상적인 커플이고, 행복하게까지 느껴지는 한 쌍이었지.

  하지만 정작 나는 오빠의 모습에 다정함이 묻어나지 않음을 알게 되었어. 물론 오빠는 마치 영토를 무한대로 확장시킨 알렉산더처럼, 목표를 다 채운 제약 영업사원처럼 내게 잘해주는 행동을 근거로 뚜렷한 족적을 남기긴 했지. 나는 눈부신 백이나 신발 같은 것을 전리품으로 얻었으니까. 하지만 이 세상에 사랑하는 사람이 오빠 하나뿐인데, 그게 다가 아니잖아. 오빠의 행동에는 정량적인 것은 있었지만 정성적인 것은 전혀 없었지. 이상하리만치 나를 위해 정성을 다한다는 마음이나 날 아껴주는 감정 같은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거야.

  왜 그럴까. 오빠는 왜 나에게 정형화된 사람이 된 걸까.

  그런 오빠의 행동이 몇 달이나 지속되면서 나는 오빠의 행동에 뚜렷한 패턴이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었어. 오빠는 일주일에 한 번, 틀림없이 나를 만났고, 밥을 먹었어(밥값은 무슨 일이 있어도 오빠가 냈지). 밥을 먹은 후에는 오빠는 에스프레소를, 나는 카페라떼를 먹었고. 최신 개봉작 영화를 본 후에 우리 집 앞까지 바래다줬어. 집 앞에서는 내 볼에 가볍게 키스를 하고 헤어졌지. 은색 승용차가 붕, 하고 우리 집 앞을 지나는 소리마저 비슷하게 느껴졌으니까.

  자로 잰 듯한 행동과 나에 대한 일정한 예의. 화도 낼 줄 모르고 똑같은 오빠의 감정. 이런 것이 컴퓨터 프로그램이 아니면 뭐겠어. 이렇게 몇 달이 지나니까 나는 한참 같은 유행어가 반복되는 개그콘서트의 인기 코너처럼 오빠가 어떤 행동을 하기도 전에 그 다음 말을 알아차리게 되었어.

  어느 날 난 오빠에게 따져 물었지.

  “오빠, 우리 만날 똑같은 것만 하니까 지루하다. 딴 것도 좀 하면 안 돼요? 나 빙수 먹고 싶은데.”

  “오빠, 오늘 너무 재미없어. 우리 재미있는 거 없을까요?”

  그럴 때마다 오빠는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어. 그러면서 정작 오빠의 행동은 변하지 않았지. 오히려 정형화된 데이트의 형태가 더 단단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

  그런데 난 오빠에게서 도망치고 싶지 않았어. 이유야 어쨌든 오빠의 똑같은 데이트는 날 편안하게 해주었으니까. 속 썩이지 않고, 바람피우지도 않고, 내 말도 잘 들었고, 오빠에게 전혀 신경쓰지 않아도 편안하게 시간이 흘러갔으니까. 싸우다가 헤어진 커플이 차고 넘치는데 내가 정형화된 오빠의 행동을 재미없어하는 것도 배부른 생각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어.

  그러던 어느 날 문자메시지가 왔어.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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