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사고와 감정을 고스란히 담을 수 없다. 그래서 시인들은 언어를 다듬었다. 그리고 다듬는 것으로 모자라 뒤집고 쪼개고 합치고 비틀어버리곤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표현하기 위해. 그리고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이 주인과 손님의 자리를 바꾸었다. 그렇게 심상과 시어는 자의적이고 부조리한 관계를 드러낸다.

  일반적으로 시니피에는 개념, 시니피앙은 시니피에를 드러내기 위한 물리적 표현이지만, 둘의 관계를 표현되는 것과 표현 매체로 본다면 언어 내에서도 그 관계를 찾아볼 수 있다.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를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둘의 관계는 자의적이며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한글은 자모가 음성기관을 본떠 만들어졌으므로 그 관계가 자의적이진 않다. 'ㄱ'은 'ㄱ'소리를 낼 때 혀뒤가 연구개에 닿는 모습을 본떠 만든 글자이며, 'ㄴ'은 'ㄴ'소리를 낼 때 혀끝이 윗잇몸뒤에 가닿는 모습을 본떠 만든 글자이다. 그러므로 전세계 글자 중에 가장 음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글자라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이 한국어의 음성을 정확하게 표기하지는 못 한다.

  한글로 표현할 수 없는 음성으로 국어학 서적에 예시로 나오는 단어로 '영등포'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영등포'의 '여'를 '반모음 ㅣ'+'ㅡ'로 발음한다. 이렇게 발음하지 않는 사람들도 발음해보라고 하면 쉽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반모음 ㅣ'+'ㅡ'에 해당하는 글자가 한글에는 없다.

  위 발음은 근래에 자주 쓰이는 발음이 아니고 일종의 변이음으로 볼 수 있으므로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거의 모든 표준어 화자의 말에 드러나고 있는데 한글로 표기할 수 없는 발음이 있다. 이는 변이음으로 보기도 힘들고 음소의 지위를 획득한 것으로 보이는데도 한글로 표기할 수 없다. 무엇일까?

  "걔가 걔랑 사귀어?"
  "지금은 아니야. 그새 또 바뀌었어."

  '사귀어'의 '귀어'는 두 음절로 발음되지 않고 한 음절로 발음된다. '바뀌어'의 '뀌어'도 마찬가지다. '반모음 ㅟ'+'ㅓ'로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아까 '영등포'의 경우와 달리 이 발음은 대부분의 한국어 화자에게 나타난다. 게다가 명백히 두 음절이 아니라 한 음절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발음을 한 음절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래서 어쩔 수 없어 '사귀어', '바뀌어'로 쓰고 있는 것이다.

  글자를 만들어야 할까? 그렇다면 해결방법은 '영등포'보단 쉽다. 'ㅣ'와 'ㅡ'를 합친 글자를 생각해내는 건 쉽지 않지만('ㅢ'는 이미 다른 음가를 나타내는 글자로 쓰이고 있다.), 'ㅟ'와 'ㅓ'를 합친 글자를 생각해내기는 쉽다. 'ㅝ'를 만들 때처럼 'ㅜ'옆에 'ㅕ'를 붙이면 된다. 이 발음이 계속 쓰이면 언젠가는 저런 글자가 만들어질까?

  아마 이 발음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는 없었던 것 같다. 현실발음으로 쓰였다면 중국어를 표현할 글자까지 만들 정도로 꼼꼼했던 세종대왕이 놓쳤을 리가 없다. 현대에 들어와 새로 생긴 것일까? 단모음 'ㅚ'와 'ㅟ'가 없어져 가는 상황에 반모음으로 'ㅟ'가 자주 쓰이게 되는 역설적인 상황이 무척 흥미롭다. 어쩌면 너무나 빠르게 '바뀌어가고', 너무나 자주 '사귀었다' 헤어지는 현실을 반영하는 건 아닐까?

*마지막 문장은 세태가 각박해지면서 된소리가 늘었다는 주장만큼이나 비과학적인 생각이니 농으로 듣고 넘기시길.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9. 1.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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