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도착했구나

기억나니
오후의 저 벤치
저 멸치국수집
저 기차역의 플랫폼

눈에다 묻고
입에다 묻고
마음에다 묻고
잘 견뎠지

이런 저녁
다시 안 올지 몰라
 
기도문처럼

흩어지는

 

- 여태천의 詩, '발자국'

 

 

 

  매일 보면서도 자각하지 못했다, 6호선 월곡역 스크린 도어에 이런 감성이 뚝뚝 떨어지는 시가 있을 줄은.

 

  '죽을 死선'보다는 한결 나은 6호선 출근길이지만 언제나 타인에, 내 마음에 부대끼는 이 곳에서 시 안의 그-조금 어려운 말로 시적 화자-는 항상 아련하다. 바쁜 출근길 한가운데 놓인 나는 항상 아련한 그를 보고 있지만 모른 체 해왔다.

  이제 더 이상 넘어갈 수 없어서, 오다가다 차오르던 감정이 가득해서, 조금씩 그렁그렁하던물이 샘솟아서, 내 블로그에 적고 말았다.

 

  그는 그녀와의 추억이 묻어나는 오후의 저 벤치, 저 멸치국수 집, 저 기차역의 플랫폼에 다다른 듯 하다. 켜켜이 쌓인 먼지 같은 기억들은 아직 그 안에 살아있다. 그는 벤치에서 조금 늦게 오는 그녀를 기다렸을 지도 모른다. 둘이 멸치국수 집에서 점심이나 저녁을 해결했을 지도 모른다. 기차역의 플랫폼에서 그녀를 만났을 수도, 기다렸을 수도, 혹은 그녀와 헤어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 내가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이야기가 그 곳에 녹아있겠지.

 

  으로 전해지는 그때 그 풍경들. 그녀의 얼굴과 옷차림, 습관들.

  로 들은 그때 그 바람 소리, 그녀 특유의 목소리.

  으로 말한 사랑 노래. 진심어린 이야기들. 미래에 대한 다짐들.

  마음으로 나누었던 그녀와의 교감. 수 많은 약속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이제 과거의 산물이고, 이제는 묻어야 한다는 것이다. 묻은 채 그녀를 잊을 수 있을 때까지 견디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인 건 무심한 세상이 그녀와의 모든 기억을 괄호치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생각보단 잘 지내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은 불행 중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불행 중 불행이었다. 그만의 전매특허였던 그녀와의 추억도, 이제 세월의 흐름에 침식되어 점차 둔탁한 모습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요즘 그녀와의 거짓말 같은 추억의 파편들이, 이제는 모두 마모되고 분실되어 흔적조차 찾을 수 없어지고 있었다. 오늘처럼 너무나 그녀가 보고 싶어 상념에 젖었던 나날들이 다시는 안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그 농도가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그녀를 다시 한 번이라도 만나고 싶다는, 그녀가 행복하기만을 바란다는 절절한 기도문은 공기에 세분화되어 흩어져가고 있었다.

 

  머릿속의 수 많은 생각들과 길고 절절한 이야기가 이토록 짧은 시어 안에 녹아들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시를 보자마자 아프고 아픈 사랑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실크로드처럼 펼쳐져 있다는 것. 매일 많은 것을 잃어버린 듯한 출근길에 깊은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는 것.  이 모든 것이 내게는 놀라움의 연속이다.

 

  가끔은 이 시가 적힌 월곡역 스크린도어 앞에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누군가에게 진실한 존재라는 마음, 진정으로 누구를 사랑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서일까. 이 시, 뜨겁고 절절한 「발자국」을 보며 나도 이런 훌륭한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김 - 랜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꽃.  (0) 2013.04.21
사랑하는 내 아들.  (0) 2013.03.29
오늘.  (0) 2013.02.22
생각 72.  (0) 2013.02.17
길(2).  (0) 2013.01.30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3. 24. 1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