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옛날 학창시절 태릉이나 드림랜드로 소풍갔을 때는 몰랐다, 나무와 풀이 그렇게 아름답고 신비한 것인줄. 난 오묘한 벚나무의 색깔을 느끼지 못했고 층층나무의 신기한 모양을 알지 못했으며, 플라타너스의 색깔이 이렇게 다채로운줄 깨닫지 못했다. 요즘 나란 인간은 풀리지 않는 일이 산적해 있을 때, 스트레스가 쌓여만 갈 때, 풀과 꽃, 나무를 보면 신기하리만치 마음이 가라앉는다. 분명 이상한 소리겠지만 풀과 나무를 볼 때 내 맘은 - 내가 모르는 사람, 어려워하는 사람을 만날 때보다 몇 배는 - 더 열린다. (누군가의 격언이지만,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데도 말이다!) 두 팔을 벌려 그것들을 안아주고 싶고 그것들에 안기고 싶다. 만약 어딘가 갈 여건이 안 된다면 동네 커피숍에서 세밀화 식물도감이나 세밀화 어린이 나무도감 같은 책을 펼쳐보고 스스로 날 위무한다.
본래 인생의 길은 20대 초반까지 결정지어 오롯이 나아가야 한다. 난 첫 스타트부터 고장난 시계처럼 늦어버렸다. 난 아무 것도 모른채 허둥지둥 치열하기만 한 삶을 살아왔다. 생각해보면 난 시야가 너무 좁았다. 그저 전과를 보고 주어진 숙제를 다 해내기만 하면 누군가에게 인정받을 수 있고 넓고 탄탄한 대로를 걸을 수 있을줄 알았다. 시야가 넓지 못했다면 하기 싫은 일이라도 평생 할 정도로 끝내주는 인내력이 있었어야 했다. 하지만 난 넓은 시야와 절대적인 끈기 둘 다 갖고 있지 못한 평균 이하의 사람이었다. 30대 초반, 이제 와서 내 성격과 성향과 맞는 흥미거리를 뒤늦게 발견했지만 현실과 여건에 가로막혀(다시 말해서 돈이 되지 않는다는 한계점 때문에) 그런 일은 얼토당토 않게 '취미'라는 탈이 되어 있는 상태이다. 도서관 사서가 그랬고 중학교 국어교사가 그랬고 동화쓰기가 그랬으며 소설쓰기가 그랬다. (동화와 소설작가는 지금도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긴 하지만) 이런 것들 모두 내 삶과는 아직 너무 멀리 떨어진 느낌이다. 난 무한대의 체력을 갖고 있는 인간도 아니라 주말에는 금세 지쳐버린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 바쁘다. 아무리 새벽형 인간이 된다 하더라도 밤에는 떡이 되어 금세 잠들 수밖에 없다.
왜 내 상황을 진작에 객관적으로 알지 못했을까. 왜 이렇게 혼돈스러운 상황을 감당해내지 못하고 있을까. 중요한 것은 나란 인간은 이런 상황을 갑자기 전복시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초기화할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또 그렇게 리셋한다 치더라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끝까지 기분좋게 나아갈 수 있을까, 하는 것도 의문점이다. 아무리 이상을 좇는다고 해도 소용없다. 지금까지도 그래오다 망한 거(?) 아닌가. 아무리 나름대로 잘 해와도,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비슷한 고통과 고민, 어려움을 그대로 떠안을 것 같은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이다. 지난한 과정 끝에 얻은 명제지만, 파랑새는 없으니까.
나는 그저 현 상황을 차분하게 되짚어본 후 나의 부족함과 함께 모두 인정하는 일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는 여태껏 해오던 대로 차질 없이 현재 하고 있는 일과 계획하고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 할 수 있을 뿐이다. 지칠 때는 쉬어가기도 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일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내일 또 월요일이 온다는 사실은 조금 역겹긴 하지만, - 나보다 몇 배는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콧방귀뀔 수 있으니까 - 내 상황에 대해 너무 티내지 않기로 한다.
이런 많은 생각이 나를 괴롭힐 때는 식물을 본다. 나무와 꽃, 풀, 열매. 인위적으로 만들지 않은 자연을 사랑한다. 예쁜 세밀화를 보며 까다롭고 제멋대로인 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지나가는 사람들, 어설프게 맺은 약속, 깨지기 쉬운 인연보다 이네들은 훨씬 오랫동안 푸르게 푸르게 내 곁을 지켜주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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