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생각이 든다. 난 왜 계속 잘못된 시간 속에 홀로 방치된 걸까.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환경이 내 의지와 무관하게 낯설어질 때가 잦다. 내 옆의 공기는 온도가 없고, 내가 걷는 발자국의 자취는 곧 재빠르게 걸어가는 다른 사람의 발자국으로 채워진다. 무생물이 된 양 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고, 어떤 기척도 들을 수 없는 채 심장이 뛰는 것만 인지하고 있는, 이른 새벽 혹은 이른 아침.

출근하려고 길음역으로 향하는데, 공기는 그녀가 부는 바람 때문에 따가워 몇 번이나 손사래를 쳤다. 그녀에게 몇 번이고 도망쳤던 인간은 나였는데, 처연함은 전매특허. 나만 갖고 있는 크레디트 카드였다. 저기 행인 모두가 갖고 있는 필부필부의 뭔가 찝찝한 기억들. 그것을 ‘사랑’이라 칭할 수 있다면, 나도 그런 나노 같은 기억을 갖고 있었다. 그것도 20대를 관통하는 무심한 세월 속에.

유희열의 ‘여름날’처럼 ‘우리 얘기도 유통기한이 있어서 끝났던’ 것일까. 시작은 내 성미처럼 급했고, 갓 익힌 사발면 용기처럼 델 것 같았다. 그러다 차츰 상온에 식더니, 뭔가 알 수 없는 역한 냄새가 날 킁킁거리게 하고야 말았다. 나는 희대의 발명품 포스트잇처럼 미묘한 균열을 뗐다 붙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8년여가 지나고서야 난 그것이 어긋난 부착임을 알게 되었다. 포스트잇은 점차 헐거워졌고, 난 도망쳤다. 그녀는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의 넓은 어깨를 갖고 있었지만 난 몇 번이고 회개하지 않았다.

그녀로부터 영원히 도망친 이후, 나는 - 개그콘서트 같은 데서 웃겨서 웃는 것을 제외하고는 -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와 아이 둘을 갖고 사는 평범한 가정을 이루는 행위 자체는 나보다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왜 나는 아직 그녀를 대면했을 때 그녀와 결혼하는 꿈을 꾸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기지개도 켜지 못한 채 잠에서 깬 것일까. 오히려 나는 그녀의 불룩 나온 뱃살, 곳곳에 도사리던 피하지방에 편안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는 오롯이 그녀만을 위하지 못했다. 나는 여위어갔고, 어줍지 않은 장인처럼 고리타분해졌다. 짐짓 연애에 관심 없는 척, 일정 부분은 수도승처럼 무감해지기도 했다.

이것이 옳은 것인가, 오래된 종교서적 같은 물음에 나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그럼 이랬으면 옳은 것인가, 라는 선문을 날린다 해도, 나는 고개를 으쓱할 수밖에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해 주었는가, 는 문제는 더존 프로그램(회계 프로그램)에 입력할 수조차 없다. 그것이 재화든, 서비스든. 늦은 가을날 환경미화원 아저씨가 무감각하게 쓸어버리는 갈색 플라타너스 낙엽에 불과한 걸. 다만 조금은 아름답지 못한 매일 아침, 그녀가 뿜는 따가운 공기를 쐬며 집을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환경미화원 아저씨는 이런 공기까지는 미처 청소하지 못하고 있는걸.

나, 슈퍼맨도 되고, 스파이더맨도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인류의 평화를 위해, 마더 테레사도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아무나’ 마실 수 있는 ‘소맥’ 한 잔을 차마 비우지 못하는 나에게 세심하고도 날카롭게 몰아치는 세상의 풍광은 내 장래희망을 가로막았다. 저축은행에 몇 년 몸담았던 적은 있지만, 아직 집값, 결혼 비용, 사랑과 평화, 집중하는 감정 같은 정작 중요한 아젠다에 생경했던 것은 그리 문제가 아니었다. 알레르기 현상으로 발진이나 두드러기가 난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이미 테트리스 게임은 끝났다. 기다리던 길쭉한 벽돌을 만나지 못한 채로.

저녁. 아침보다는 한결 청포도 같았다. 여전히 따가운 공기는 내 손에 닿으면 곧 흩어졌다. 사랑받고 싶어서, 라고 결국 흩어질 말을 혼자 중얼거리며 움집 같은 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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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9. 16. 1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