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너 혹시 처음 본 그 남자랑 술 마시러 간 거야?”

  “응, 나도 내가 왜 그 산적이랑 술을 마시러 갔는지 모르겠어. 제일 큰 이유는 역시 명품 지갑과 시계였지만, 날은 더운데 그냥 집에 들어가긴 싫고. 그냥 맥주 한 잔이 떠올랐어. 그래서 난 카페 옆에 있는 치킨전문점에 갔지. 치킨집에서 뼈 없는 닭 한 마리와 맥주 500cc 두 잔이 나온 것을 보고는 우리는 할 말 없이 어색하게 앉아 있었어. 그리고 산적은 일단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치킨을 먹었어. 어쩌면 같이 앉아 있는 나에게는 관심도 없이 그렇게 치킨과 맥주를 먹는 일에만 집중할 수가 있는 건지.”

  “그 사람 되게 웃긴다, 너한테 관심을 가져놓고 왜 혼자 닭만 먹는데.”

  “산적은 500cc를 하나 더 시키려고 종업원을 불렀고, 나는 이제 그만 마시고 돌아가자고 했지. 그런데 산적은 생김새와 달리 술이 정말 약한 거 같았어. 눈이 좀 풀려 있었거든. 자꾸 더 먹겠다고 나한테 그러는 거야. 나는 맥주를 반쯤 비웠고, 그 사람은 치킨과 맥주를 깡그리 비웠는데도 뭐가 그렇게 아쉬워서 맥주를 더 먹으려는 건지 몰랐어. 나는 속이 불편한 척 하고는 화장실에 가서 온갖 생각을 다 했어. 정신이 없는 틈을 타서 지갑을 내 것으로 만들고 도망칠까, 아니면 넌 역시 내 맘에 드는 남자가 아니었다는 생각의 표시로 그냥 집에 갈까. 범죄자가 되느냐, 재수 없는 헌팅녀가 되느냐 고민하고 있다가 나는 가방을 자리에 놓고 왔다는 걸 알아차렸지. 모든 가능성을 접어버리고 다시 얌전히 내 자리로 돌아온 거야. 난 내 자리에 말없이 앉았고, 산적은 추가로 주문한 맥주를 연신 자기 위장에 부어 넣고 있었어. 난 언제라도 무슨 일이 발생하면 일단 도망가겠다는 생각으로 보라색 크로스백을 만지작거리고 있었어.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무슨 일은 금방 생기고 말았지.”

  “그래? 그 사람이 널 때린 거야, 아니면 혹시 다른 쪽으로?”

  “굳이 말하자면 다른 쪽이겠지만. 맥주만 먹던 산적은 갑자기 마음이 달라진 건지, 덜컥 내 옆자리에 앉아버렸어. 큰 몸집으로 내가 도망갈 길을 완전히 차단해버리고는 갑자기 내 옷자락에 슬며시 자기 손을 갖다 대는 거야. 난 정말 당황했어.”

  “야, 그게 정말이야? 너 그런 상황이 생기면 남자친구, 아니 나한테라도 구조 요청해야지.”

  “물론 널 포함한 많은 남자들이 순간적으로 내 머릿속을 스쳐갔는데, 산적의 힘은 천하장사여서 그런 생각은 소용없었어. 묵직한 손이 순간적으로 내 다리나 팔꿈치를 스치니까 그런 생각은 순간적으로 내가 그 웃음카페를 간 것에 대한 후회로 바뀌더라고. 그리고는 빨리 얘를 밟고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

  “정말? 어떻게 된 거야? 되게 놀랐겠다, 너. 빨리 얘기해봐.”

  그녀가 대답할 순간을 참지 못하고, 그는 그녀에게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되는지 캐물었다. 마치 미니시리즈 드라마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일주일을 참지 못하고 드라마만 생각하는 마니아처럼. 곤경에 처한 여주인공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팬의 입장에서 그는 그녀를 진심으로 걱정했다. 수화기 너머에 앉아 있는 5월 같은 그녀도, 이 순간에는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답답함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수화기 건너편에 있는 6월 같은 그는 빨리 그녀가 5월 31일의 싱그러움을 회복하길 바랐다. 내일이면 6월 1일이 올 수 있다는 희망을 그도 공유하고 싶어서. 단지, 그녀가 아픈 게 싫어서.

 

 

 

(* 22-6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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