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햇살이 삐죽 얼굴을 내민 4월 어느 날이었어요.
지금은 체육 시간. 흰 체육복으로 갈아입은 저와 친구들이 운동장으로 나갔어요. 체육 선생님과 우리 반 몇 아이들이 뜀틀과 매트를 운동장 한 가운데에 깔았어요.
‘오늘은 뜀틀 시간인가? 저번에 뜀틀 못 넘어서 너무 창피했는데. 내 차례가 안 왔으면 좋겠다.’
그러나 제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어요. 체육 선생님께서 말씀하셨거든요.
“자, 오늘도 뜀틀 연습할 거다. 이번 시간까지 연습하고 이거로 다음 시간에 중간고사 실기평가 볼 거니까 신경써라. 자, 그러면 한 줄로 서라.”
체육 선생님 말씀대로 우리 반 아이들은 한 줄로 서서 뜀틀 넘을 차례를 기다렸어요. 저는 뜀틀이 무시무시한 괴물 같아서 맨 뒤로 숨고 싶었어요. 저는 5학년이나 되었는데도 키가 다른 아이들보다 작고 배가 볼록 나왔어요. 그래서 아이들이 화성인이라고 놀려서 너무 싫어요. 저는 맨 뒤에서 어쩔 줄 몰라 고개를 숙이고 애꿎은 운동장 바닥만 보고 있었어요. 키 크고 싸움 잘 하는 애들이 뜀틀을 향해 바람처럼 달려가는 모습이 부러웠어요. 휙 하고 뜀틀을 넘고는 다시 줄 서는 아이들 틈으로 들어와 내 앞에 줄을 섰어요. 저는 휴, 하고 한숨을 쉬었어요. 1초라도 제 순서가 늦게 돌아오니까요.
다른 남자애들도, 여자애들도 뜀틀을 넘었어요. 중간 중간 뜀틀에 걸리는 애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잘 넘었어요. 뜀틀에 걸리는 애들에게는 체육 선생님께서 이런저런 말씀을 하셨어요. 손을 뜀틀 뒷부분에 잡고 뛰라는 이야기 같았어요. 어쨌든 애들은 저처럼 누구도 뜀틀을 무서워하지 않았어요. 5단짜리 뜀틀도 아이들에게 그렇게 높아 보이지 않은가 봐요.
“야, 임경섭. 넌 왜 자꾸 뒤로 가? 줄 서서 뜀틀 해야지. 빨리 줄 서.”
뜀틀을 넘은 경수가 제 뒤로 줄을 서며 저한테 말했어요. 경수 목소리가 커서 저는 줄을 서지 않을 수 없었어요. 저는 빠르게 줄어가는 줄을 보며 가슴이 콩알 만해지기 시작했어요. 두근두근하며 제 가슴이 앞뒤로 움직여서 저는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였어요.
드디어 제 차례에요. 저는 힘차게 뛰어갔어요. 그런데 멀리서 보아도 높아보이던 5단 뜀틀이 제 앞에 오니 제가 평소에 가던 동네 뒷산 같이 높아져 있었어요. 저는 그만 뜀틀 앞에서 멈춰 섰어요. 뜀틀이 무서웠어요. 저는 뜀틀을 잡고 고개를 숙였어요.
“야, 너 왜 뜀틀을 못 넘어? 뜀틀 뒤를 잡고 그냥 뛰면 넘어가는 거야. 자, 선생님이 하는 거 잘 보고 따라 넘어봐.”
무섭게 생긴 체육 선생님이 날 보며 말씀하셨어요. 강한 목소리로 저한테 말씀하셨지만 그렇게 혼나는 느낌은 아니었어요. 저는 체육 선생님보다 뜀틀이 훨씬 무서웠거든요. 뜀틀을 넘지 않고 체육 선생님께 계속 야단을 맞는 게 나을 거 같았어요.
저는 체육 선생님이 뜀틀 넘는 걸 지켜봤지요. 체육 선생님은 정말 뜀틀 선수라는 게 있다면 해도 될 정도로 뜀틀을 정말 잘 넘었어요.
‘난 언제 저렇게 하나. 뜀틀이 너무 무서워. 나 어떡하지.’
저는 다시 뜀틀로 뛰어갔어요. 그런데 이번에도 뜀틀은 저에게 큰 산이나 바위처럼 무겁고 크고 높게만 느껴졌답니다. 결국 전 뜀틀 윗부분에 가슴이 부딪혔어요.
“야, 괜찮니?”
사실 전 하나도 아프지 않았어요. 무엇보다 무서운 건 쿵쿵쿵 하면서 저한테 다가오는 것만 같은 뜀틀이었어요. 그리고 여자애들도 잘 넘는 뜀틀을 우리 반에서 나 혼자 못 넘는다는 게 너무 부끄러웠답니다.
“네.”
죄송해요, 라고 하고 싶었어요. 체육 선생님 말을 안 들은 거니까. 하지만 그 말이 입 밖에 나오지 않을 정도로 창피한 기분이었어요.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체육 시간이 끝났어요. 저는 집에 와서도 온통 뜀틀 생각 뿐이었어요. 점심시간에 급식 반찬으로 나온 햄도, 된장국에 있던 두부도 뜀틀처럼 보였어요. 점심 먹고 사회 시간에 나온 세계 지도를 보면서 전 이렇게 생각했지요.
‘다른 나라 가면 뜀틀 안 넘어도 되는데.’
학교 끝나고 수학 학원에 가는데도 제 눈에 어른거린 것은 뜀틀이었어요. 오늘 학원 가서 배울 도형은 제가 잘 아는 거라 배울 필요가 없었어요. 차라리 저는 수학 학원에서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하고 뜀틀을 갖다 놓고 한 시간 동안 뜀틀만 죽어라 넘고 싶었어요. 그런데 몰래 가본 수학 학원 창고에는 뜀틀이 없더라고요.
집에 와서 저는 자려고 깔아놓은 이불 위로 이제 안 덮는 겨울 이불과 요를 뜀틀 모양으로 잔뜩 얹어 놓았어요. 무섭지만 어떻게든 넘고 싶었어요. 아니, 넘지는 못 하고 중간에 다리가 걸리더라도 뜀틀을 짚고 뛰고 싶었어요.
이불과 요를 제법 단단히 고정시키고는 계속 점프를 해 보았어요. 제가 뚱뚱해서 점프가 잘 되지 않아 이불에 부딪히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했어요. 그래도 이불은 푹신해서 괜찮았어요. 모양도 뜀틀처럼 무섭지 않았어요.
계속 제 모습을 보시던 엄마가 조금 화난 표정으로 말씀하셨어요.
“경섭아, 먼지 날리게 겨울 이불은 왜 잔뜩 꺼냈어? 지금 뭐하는 거니?”
“엄마, 저 뜀틀 넘어야 되어서요.”
제 대답을 들은 엄마는 말씀하셨어요.
“이렇게 땀이 많이 나는데. 아무리 연습할 데가 없어도 그렇지. 내일 학교 가야 하니까 적당히 하고 자렴. 힘들면 이불은 엄마가 올려놓을 거니까 땀 씻고 옷 갈아입고 자라.”
‘어차피 제가 이불은 치울 생각이었어요.’
이불 앞에서 점프하는 건 무섭지 않아서 저는 밤이 늦도록 계속 연습했어요.
다음 날, 저는 몸이 아파서 일어나기가 힘들 정도였어요. 계속 뛰어서 발목이 아팠답니다. 그래도 저는 학교 끝나고 학원 갔다 와서 저녁 때 이불을 쌓아놓고 계속 뜀틀 연습을 했어요.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오지 않았으면 했던 체육 시간이 다시 왔어요.
이번에도 어김없이 흰 체육복으로 갈아입은 저와 친구들이 운동장으로 나갔어요. 오늘도 체육 선생님과 우리 반 몇 아이들이 뜀틀과 매트를 운동장 한 가운데에 깔았어요.
체육 선생님은 운동장을 아이들과 한 바퀴 돌고는 우리를 보고 말씀하셨어요.
“자, 오늘 말한 대로 뜀틀 실기평가 본다. 번호대로 줄 서서 몇 번이라고 말하고 넘으면 된다. 도약-공중동작-착지를 다 보고 점수를 줄 거니까 평소에 선생님이 알려준대로 넘으면 점수 잘 줄게. 자, 그럼 1번부터 넘어.”
체육 선생님의 말이 왜 이렇게 짧게만 느껴지는지. 전 키도 작아서 5번이라 다섯 번째로 뛰어야 해요. 집에서 그렇게 연습했는데 운동장에서 본 뜀틀은 여전히 늠름한 장군 같았어요. 사회 시간에 배운 강감찬 장군이나 이순신 장군 같은 모습이었어요.
이제 제 차례가 되었어요.
“5번이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고는 뜀틀을 향해 열심히 뛰어갔어요. 주문을 외우면서요.
‘이건 이불이다. 요다. 이불이다. 뛰어도 안 아프고 푹신푹신하다.’
길게만 느껴지던 거리가 점점 짧아지면서 뜀틀을 향해 다가갔어요. 마침내 저는 뜀틀 윗부분을 탁, 하고 잡았어요. 딱딱한 뜀틀 맨 윗부분은 말랑말랑해서 잡을 만 했어요. 물론 우리 집 이불처럼 푹신하지는 않았지만요.
그리고, 저는 뛰었어요. 발목이 아픈 느낌은 있었지만 괜찮았어요. 그런데 우리 집 이불보다 뜀틀은 높고 길었어요. 결국 얼마 뛰지 못한 나는 뜀틀 위에 툭, 하고 앉아버렸어요.
나는 창피한 마음에 얼굴이 빨개지고 눈물이 나올 뻔했지요. 여자애들도 다 넘는 뜀틀인데 저만 또 이렇게 넘지 못했잖아요. 그래도 저는 남자라 울음을 꾹꾹 참았어요.
홍당무가 되어있던 제게 체육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임경섭, 너 평소에 뜀틀 근처도 못 가던 놈 아니니? 이야, 그래도 뜀틀을 향해 점프도 하다니. 운동장에서 연습 많이 했구나. 그래, 그렇게 조금씩 용기를 갖고 하면 할 수 있어. 정말 잘 했어. 잘 했고, 다음에 좀 더 내 말 듣고 연습하면 딴 애들처럼 휙 하면서 잘 넘을 수 있겠다. 경섭이한테는 딴 애들보다 못 하긴 했어도 노력점수 좀 더 줄게. 이만 들어가라.”
딴 애들한테는 번호만 부르는 체육 선생님께서 제게 이름을 불러주시다니. 저는 무섭기만 한 체육 선생님에게 이런 말을 들어서 기뻤어요. 눈물은 쏙 들어가고 갑자기 어깨에 힘이 들어갔죠. 에헴, 하고요. 이런 적은 처음이에요.
사실 뜀틀 앞에서 점프하지 못했을 때는 뜀틀이 무서운 괴물 같게만 느껴졌는데, 지금은 그래도 내가 이길 수 있는 게임의 첫 번째 판 왕 같았어요. 뜀틀 윗부분에도 딱딱하지 않은 매트가 있어서 다치지 않겠더라고요. 어쨌든 이번에는 체육 점수 때문에 제 평균이 깎이지는 않을 거 같아요. 전에는 매번 체육에서 최하 점수를 받았는데 이번에는 노력 점수가 있으니까 다행이에요.
그런데 체육 선생님 말씀처럼 제 안에 용기라는 아이가 정말 있긴 한 걸까요. 용기란 아이가 있다면 언제부터 제 안에 살았던 걸까요. 전 키 작고 배 나온 아이 그대론데. 그런데 갑자기 제게 괴롭히던 봄바람이 따뜻하게 느껴지고, 큰 산 같던 뜀틀도 조금은 작아 보였어요. 또, 전에는 체육 시간이 길게만 느껴졌는데, 지금은 체육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아요.
다음 체육 시간이 되었어요. 체육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오늘은 뜀틀 위에서 앞구르기를 연습할 거다. 실기평가 볼 거니까 오늘부터 연습해라. 앞사람부터 시작!”
뜀틀 위에서 앞구르기라, 또 다시 뜀틀이 무서워졌어요. 그래도 해볼 거예요. 잘 되든, 그렇지 않든. 못하면 학원 끝나고 집에서 또 연습하면 되죠.
저는 앞구르기를 하기 위해, 뜀틀 앞부분을 잡고 힘차게 점프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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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제 얘기를 바탕으로 써 봤습니다. 제 얘기라 진심을 가득 담아서 쓸 수 있네요. 다음엔 지어낸 얘기라도 제 진심을 가득 담아서 쓸 수 있는 실력을 기르겠습니다.
동화작가 지망생에게 글이 안 써지는 것은 (야구) 타자에게 안타가 나오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계속 글이 나오길 기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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