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어릴 적
초등학교 운동회 날
아이들은 모두 아버지 손을 잡고 달리는데
나는 하릴없이 높아진 하늘을 바라보다가
아버지가 떨어뜨리신 구름 한 조각을 잡고
혼자 달렸다. 그 운동장이 너무 넓어 울며 달렸다.
- 강중훈, 「구름 한 조각 손에 쥐고 혼자 달렸다」
지하철 6호선 동묘앞역 스크린도어에 걸린 시다.
지하철 스크린도어를 바라보며
처음 읽었을 때는 에이, 이게 뭐야, 하다가
두 번째 읽었을 때는 깔끔하게 쓰긴 하는구나, 하다가
세 번째 읽었을 때는 잔잔하다, 하다가
네 번째 읽었을 때는 가슴이 일렁이는구나, 하다가
다섯 번째 읽었을 때는 나도 모르는 슬픔에 스크린도어를 바라볼 수 없었다.
나는 처음에 화자의 아버지께서 바쁘시거나, 그냥 귀찮거나, 기타 등등의 이유로 운동회에 못 나오신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화자의 아버지는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었다.(내가 이해력이 심히 딸리는 것이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화자가 왜 혼자 달리면서 '높아진' 하늘을 바라보았겠는가.
화자의 아버지께서 ‘하늘’에서 구름 한 조각을 왜 떨어뜨리셨겠는가.
화자의 아버지께서 이 세상에 계시다면 왜 '넓어진' 운동장을 울며 내달렸겠는가.
잔잔하면서도 슬픈 감정을 이끌어내는 시인의 필력에 놀랐다. 역시 시란 한순간의 감정 폭발도 중요하지만 잔잔하면서도 먹먹해지는 감동을 이끌어내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다.
어쨌든 일상에서도 슬픔은 군데군데 덕지덕지 붙어있는 것이었다. 내가 감당 못할 정도의 슬픔, 또 다른 감정은 어디에 숨어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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