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여덟시에 나는 길이었고, 집으로 가는 중이었고, 아우성이었고, 법이었고, 꽃이었고,

  정오 열두시에 나는 사막이었고, 상영 금지된 영화였고, 부러진 꽃이었고, 겨울이었고, 실연이었고, 그래도 법이었고, 집으로 가는 중이었고, 길이었고.

(조말선, 「가변차선」,  『매우 가벼운 담론』, 문학세계사, 2002, pp.31)



  너무너무 피곤해서 그날이 언제였는지도 나는 모르겠어. 그냥 나는 구내염의 전조로 짐작되는 까끌거리는 입맛과 기분을 안고 힘겹게 집으로 가는 길이었지. 서울역, 4호선. 스크린도어의 시는 내 입맛에 맞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는 것도 있지만. 그냥 말의 장난이라 보기에 이 시는 정말 정갈했기 때문에, 그랬기 때문에 난 별로 좋지 못한 핸드폰 카메라를 작동시키지 않을 수 없었지. 난 왜 이런 시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할까.

  내가 이 시를 내 막눈으로, 막머리로 잘못 해석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지럽고 혼돈의 나날을 걷고 있는 내 마음이랑 이 시는 왜 이렇게 똑같을까. 갈 곳 없는 마음이 지쳐서 노란색 푹신한 벤치를 찾는데, 이 시가 왜 이렇게 첫맛은 쓰고 끝맛은 달콤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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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2. 6. 15: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