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엄마.”
저는 큰 소리로 엄마를 불렀어요. 그런데 엄마는 대답이 없었어요.
“엄마!”
“응, 파랑아, 왜?”
두 번째가 되어서야 엄마가 대답했어요.
“벌써 점심시간이 두 시간이나 지났네. 나 배고파.”
“얘, 오늘 아침밥도 늦게 먹었잖니. 네가 먹은 바람은 어떡하고.”
저는 공장에서 태어난 파란색 풍선이에요. 바람을 먹으면 배불뚝이가 되는 풍선이요. 그런데 아침 늦게 바람을 너무 많이 먹어서 배가 많이 나왔어요. 전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서 자꾸 배가 고파요.
“나도 그냥 보통 사람들처럼 맛있는 밥도 먹고 음료수도 먹고 초콜릿도 먹고 싶은데. 왜 난 바람만 먹어야 할까.”
“우리는 풍선이잖아, 아들이나 나나. 그러니까 바람이 우리 밥이지. 밥을 먹어야 피부 노화도 안 생기고.”
엄마 말이 맞아요. 바람밥을 안 먹으면 금세 몸이 쭈글쭈글해져요. 근데 밥을 너무 많이 먹어도 몸이 터져 죽을 수 있어요. 몸이 터진다는 생각을 하니까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쏙 들어가 버렸어요.
“근데 엄마, 왜 난 엄마랑 하나도 닮은 구석이 없어?”
정말이에요. 제가 태어날 때 저보다 먼저 태어난 분이 저더러 엄마라고 했는데 저랑 엄마는 닮은 점이 없었거든요.
“왜 갑자기 그 소리니?”
“아니, 난 파란색인데 엄마는 붉은색이잖아, 그리고 엄마는 길쭉해서 모양이 양도 됐다가, 늑대도 됐다가, 솜사탕도 되는데, 나는 그랬다가는 큰일 나잖아. 엄마 말씀처럼 몸이 터져버릴 테니까.”
저번에 제가 인간들의 ‘돌잔치’에 갔던 적이 있었어요. 개구쟁이 어린아이 손에 들려 있을 때 엄마는 우스꽝스러운 아저씨가 빨간 엄마를 양이나 늑대로 만드는 걸 봤어요.
“우리는 그래도 같은 풍선이야. 길쭉하든 동그랗든 우리는 푸른 하늘을 두둥실 떠다닐 수 있고, 물 위에서는 둥둥 떠다니면서 아름다운 꽃도 보고 곤충도 볼 수 있는 풍선이야. 물론 사람들처럼 내가 널 낳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를 관리하는 주인이 예쁜 꼬마 아가씨잖니. 그러니 특별히 잃어버리지 않는 이상 우린 꼬마 아가씨와 같이 다녀야 하는 풍선들이지.”
우리는 풍선이에요. 풍선이니까 뾰족한 가늘이나 바늘 같은 것을 만나면 안돼요. 그래서 저는 엄마랑 되도록 오래 붙어있어야 해요.
“그건 그렇고. 아들, 혹시 ‘분홍이’ 좋아하니?”
또 엄마는 분홍이 얘기를 해요. 분홍이는 나랑 어렸을 때부터 함께한 친구인데 꾸불꾸불하게 생긴 분홍색 풍선이에요. 자기는 자기 몸을 S라인이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냥 꽈배기로만 보여요. 그렇게 분홍이한테 꽈배기라고 내가 놀리면 분홍이는 나한테 배불뚝이 아저씨라고 맞받아쳐요.
“엄마, 왜 나만 배불뚝이로 생겼어? 억울해, 치. 아무리 배가 나올 수밖에 없는 모양이라고 해도 난 내 모습이 정말 싫어. 나를 만든 사람이 어떤 공장에 있는 아저씨인지 모르겠지만, 나도 엄마처럼 이 모양 저 모양 다 할 수 있는 길쭉한 풍선으로 만들어 줬으면 정말 좋을 거 같은데. 그럼 분홍이 같은 예쁜 척하는 애들한테 배 나왔다고 놀림도 안 받을 거고.”
그러자 엄마는 따스하게 말했어요. 너는 너대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고, 생일파티 때 나같이 생긴 애들이 없다면 생일파티하는 맛도 안 나고 재미도 없을 거라고, 운동회 때 내가 있어 몸통 속에 밀가루 묻힌 사탕도 넣을 수 있다고, 꼬마들이 입가에 잔뜩 밀가루를 묻히고 릴레이경주를 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고.
“그래도 요즘은 마술사 아저씨들이 엄마 같은 길쭉한 것들을 꼬아서 예쁜 동물을 만들면 아이들 눈이 얼마나 커지는데. 딴 거는 할 생각도 못하고 그 풍선만 바라보는데, 난 걔네들이 너무 부럽더라.”
“그래도 넌 아이들에게 재미와 웃음을 선사하지 않니. 그래서 분홍이가 널 굉장히 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
그건 그래요. 만날 애들이 나랑 놀면 재미있는지 그렇게 낄낄하고 웃어요. 숨바꼭질을 해도 배불뚝이인 내 모습 때문에 먼저 잡히는 건 일상이에요. 술래를 안 한 날이 없어서 좀 속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그래서 이 엄마가 생각하기엔, 분홍이도 널 좋아하는 거 같아. 너보다 6개월 정도 먼저 태어난 엄마가 보면 딱 알지.”
나이가 많은 풍선들은 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 같아요. 그냥 남자 풍선과 여자 풍선이 함께 있으면 둘이 사귀는 거로, 깊은 사이라고요. 우린 아닌데. 엄마가 나와 분홍이를 본 날도 분홍이가 나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던 때였거든요. 길쭉하고 날렵하게 생긴 검은 풍선 자식. 요즘 텔레비전에 나오는 가요프로그램 보면 꼭 떼로 나와서 춤추고 노래하는 애들처럼 꼭 그렇게 생긴 아이에요. 허우대만 멀쩡하게 생겨서 강호동 같은 씨름풍선이 툭 치면 바로 쓰러질 거 같이 생긴. 분홍이는 왜 그런 애들이 좋은 건지 모르겠어요.
“너 같은 애들이 실은 그런 애들보다 훨씬 진국인데. 몇 번만 만나도 그걸 알 건데, 안타깝네.”
엄마는 또 그런 얘기에요. 진국이니 뭐니 하는 말이요. 정말 우리 엄마라서 제가 예뻐 보이는 거 같아요.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냥 배불뚝이 풍선일 뿐인데.
“몰라, 분홍이랑은 그냥 친구로 지낼 거야. 내가 좋아하면 뭐해, 걔가 다른 곳만 바라보는데. 엄마! 저 친구들이랑 약속해서 놀러 갔다 올게요. 헬륨가스 한 잔 마시기로 했어.”
저는 갑자기 약속이 생각났어요. 친구랑 청담동 가서 헬륨가스 마시기로 했거든요.
“아들, 그거 너무 많이 마시면 하릴없이 둥둥 떠다닐 거니까 적당히 마시고 들어와, 알았지?”
“응, 엄마. 걱정 마. 갔다 올게.”
“엄마.”
“아이구야, 헬륨가스 먹고 온다더니 왜 이렇게 표정이 어두워? 친구들이랑 싸웠니?”
제가 시무룩한 얼굴로 집에 들어오니 엄마는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으셨어요.
“아니. 우리 친구들은 다 착한 애들이라. 엄마도 잘 알잖아.”
“그럼 무슨 일인데. 엄마한테 다 말해봐.”
실은 오늘 친구들을 만나서 놀다가 불량배를 만났거든요. 그 얘기를 엄마한테 했어요.
“그, 그게 정말이니? 그놈들이 왜 하필 거기 있었다니. 안 다친 게 다행이다. 바늘로 위협해서 돈 달라고 하면 그냥 고분고분하게 내놓는 게 좋아. 안 그러면 그 바늘로 스치기만 해도…. 아이고,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안 그래도 엄마 말처럼 걔네들이 바늘을 꺼내서 돈을 내놓으라고 저희를 위협했어요. 어쩔 수 없이 돈을 뺏겼는데 방귀를 잘 뀌는 친구 초록이가 긴장을 했는지 공기구멍에서 헬륨가스가 새어 나왔던 거예요. 그 방귀 소리 때문에 불량배들이 웃어서 걔네들끼리 배꼽잡고 쓰러졌지 뭐에요. 그 새 저희는 도망쳤어요. 초록이 때문에 다친 애들이 없어서 다행이었어요. 초록이는 여자친구 만날 때도 긴장해서 시도 때도 없이 방귀 뀐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거든요.
“엄마는 오늘 은행가서 주민세 좀 내고, 미용실 갔다 왔어. 또래 아줌마들이랑 수다 떨고 그런 거지. 그러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거지.”
“나는 창피해서 아줌마들 많은 미용실 못 가는데. 가도 남성전용 미용실이지. 어른들 참 재미없다. 원래 어른이 되면 모든 일이 다 무미해지는 거야? 엄마도 만날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은 생활만 하고 있잖아.”
“밥을 먹어도 시간이 지나면 배가 고프고, 미용실 가서 펌을 해도 시간이 지나면 머리가 풀리고, 잠을 자도 하루를 보내면 잠을 자야 하는 거잖아. 결국 다 그런 다람쥐 쳇바퀴 도는 삶 속에서 행복을 찾아가는 거겠지. 그 생활 속에서 재미를 찾아야지 별 수 있겠니.”
엄마는 어른이라 정말 많은 걸 알고 계세요. 마음 속으로 표현하지 못했던 말을 엄마는 계속 나한테 들려주고 있으니까요. 저도 커서 엄마처럼 현명한 사람이 되어야겠어요.
“오늘 아들 기분이 우울한 거 같구나. 공원 가서 산책 좀 할까?”
“엄마. 밤엔 참 별이 많은 거 같아. 여긴 대도시가 아니라 그런지 항상 밤만 되면 별이 떨어질 듯 반짝거려.”
엄마 말대로 근처 공원으로 산책 나왔어요.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 떠다닐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산책 나오면 몸처럼 마음도 둥둥 뜨는 것 같아서 좋아요.
“정말 너 말대로야. 항상 별은 그 자리에 떠 있는 것만 같아. 우리는 여기 있고.”
그리고 전 엄마한테 얼마 전에 경험했던 이야기를 천천히 꺼냈어요.
“나 사실 엄마한테 말 안 한 게 있는데. 한 달 전엔가, 밤에 이 공원에서 별을 혼자 보고 있는데, 정말 아름다워서 근처에서 별을 보고 싶었던 거야. 그래서 풀씨만큼 가볍게 몸을 만든 다음 두둥실 떠올랐지. 얼마나 떠올랐을까. 더 가까이 갈 수도 없을 만큼 갔는데도 별은 저 하늘 위에 촘촘히 박혀있는 거야. 별은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하늘 끝에 있었던 거야. 그래도 내가 사람들과는 달라서 땅 위로 둥둥 떠다닐 수는 있다는 게 장점인데 별은 저보다 한참 위에 있었네.”
“아들, 감성적인 건 좋은데 그러다 옆집 갈색 배불뚝이 풍선아저씨처럼 너무 떠올라서 가죽이 다 헐거워진다. 그 아저씨 아들이 별을 따달라고 해서 다이어트한 몸으로 하늘 높이 올라갔다가 갑자기 몸이 이상해서 보니까 뱃가죽이 헐거워져 있었대. 다시 내려가려고 발버둥 쳐도 내려가지도 못하고 얼마저 안쓰럽던지. 그래서 한동안 그 아저씨 병원에 다녔다나봐. 그러니까 아들도 몸 안 상하게 조심해, 앞으론. 떠다니더라도 적당히 떠다니고, 알겠지?“
“응, 엄마. 알겠어.”
“그리고 내가 얘기 들어보니까 아까 한 얘기 분홍이랑 만날 때 해주는 거 어때?”
이 얘기를 어떻게 분홍이한테 해요. 분홍이는 멋있는 남자 이야기만 잘 들어준다고요. 제 이야기는 식용유처럼 그냥 흘려버린다고요.
“여자들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기 마음을 비추어볼 수 있는 거울 같은 남자를 좋아한단다. 이런 공원에 단 둘이 호젓이 앉아서 쏟아지는 별을 바라보며 네가 방금 한 얘기를 하면 평소 개구쟁이처럼만 보였던 네 모습이 좀 달라 보일 거야. 또 자기가 언뜻 생각했고, 담아두었던 얘기를 친하게만 지냈던 남자가 해준다면 공감대를 형성할 거고. 말이 잘 통할 거라는 거지. 여자들은 밝고 활기차다가도 가끔은 이런 분위기를 잡는 남자를 좋아한다니까. 내가 아까 얘기했지? 분홍이는 널 좀 더 만나면 널 꼭 마음에 들어 할 거라고.”
정말일까요. 분홍이는 그 검은 풍선 애만 좋아하던데. 가까워질 수 있을까요.
“엄마는 참…. 알았어요. 나중에 기회 되면 분홍이랑 단 둘이 있어봐야지. 근데 정말 내 따분한 얘기들을 분홍이가 들어줄까 모르겠어요.”
“아 글쎄, 엄마 말 한 번만 믿어봐. 엄마 말 안 믿으면 누구 말을 믿어? 하하. 날도 추운데 이만 집으로 들어가자. 내일은 세탁소에 가서 우리 옷 좀 맡겨야겠다. 세탁소 아저씨는 항상 웃는 게 매력이더라. 그 호방한 웃음소리 들으면 기분까지 상쾌해진다니까.”
피곤해진 저랑 엄마는 다시 집으로 들어가기로 했어요. 그냥 내 생각이긴 하지만, 별은 여전히 반짝거리고 그 중 두 별이 저와 분홍이인 거 같았어요.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제 몸이 헬륨가스를 마시지도 않았는데도 다시 둥둥 떠오르는 거 같았어요. 떠오르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힘들지만, 그런 마음으로 다음에 분홍이를 만나기로 했어요.
다음에 이 마음을 그대로 전해주고 싶어요. 반짝이는 별 하나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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