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 독

오늘도 늦잠을 잔 게 확실하다. 쳐 놓은 커튼 사이로 기상을 재촉하는 햇볕이 방 안의 어둠을 다소 밝혔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요와 이불에 남아있는 온기가, 얼마 남지 않은 소프트 아이스크림의 크림 부분처럼 아쉬워서 반쯤 뜬눈을 완전히 뜨지 못하고 풀썩 뻗어 있었다. 평소에도 나는 개인적으로 잠에서 덜 깬, 약간 몽환적인 분위기를 너무나 좋아한다. 그러나 오늘은 복권에 당첨된 사람처럼 그렇게 웃고만 있었다.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다른 사람이 지금 내 자세 - 뻗어 있는 채로 웃고만 있는 모습으로 - 를 본다면 코미디로 느낄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내 자신, 그냥 매사에 태평한 성격도 아닌데 오늘 아침은 단지 느낌이 좋다는 이유로 어찌 보면 내 안에 주어진 시간을 황당하게 낭비하고 있었다.

"너무나 신이 나서 커튼을 활짝 열어 젖혔다"라는 묘사를 하고 싶지만 그 분위기에 홀딱 반해서 내 방의 분위기를 놓치고 싶지 않은 바람에 놔두었다. 나는 그렇게 한 채 평소 아침처럼 E-Mail을 검색하고 문자메시지를 확인하며 이소라의 "너에게 나를 바친다"를 반복했다. 물론 아침, 도가니탕을 끓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생각해봐 왜 이러는지 왜 너만 원하는지

그렇게 채이고 또다시 도전하는 기분을

넌 아마 모르겠지만

 

의식인지 무의식인지 모르겠지만, 항상 이 부분이 나오면 허밍이든 휘파람이든 그를 놓치지 않았다. 나는 이미 끓고 있는 도가니탕의 불을 껐다.

<신지야~>

갑작스럽게 애완견이 나를 덮쳐서 아침 준비를 하다가 달려드는 애완견을 온몸으로 맞이해야만 했다. 달려드는 신지 때문에 “신지야~”, 라는 말이 먹혀버렸다.

<신지야, 너도 스윗한 도가니탕 먹을껴?>

애완견의 마음에 대해 잘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신지는 약간 시큰둥한 것 같았다. 신지는 암컷이고 하운드 덕이다. 약간 이상한 말인 것 같지만 난 애완견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증오했었다. 단지 수연 씨의 favorite가 하운드 덕이었기 때문에 나는 억지 춘향 격으로 애견 센터로 끌려 가 순전히 강압과 자의에 키워본 적도 없는 그녀를 덥썩 물게 된 것이다. 어즈버, 약 2.75초 정도 생각해 보니 지금 내 앞에 보이는 것들은 내가 좋아하는, 그러니까 나의 스타일이 아닌 수연 씨에게 철저히 맞춰진 코드였다. 그러니까 아까 이야기한 아침의 풍경을 비롯하여 하운드 덕, 이소라, 도가니탕까지. 이상하리만치 이 소재들은 내가 싫어하거나 마음에 두고 있지 않은 사항이 부각된 것이었다. 아도르노처럼 나는 수연 씨에게 나의 기호를 팔아버린 채 수연 씨의 기호를 나의 생활세계에 이데올로기화한 것이었다. 실제로 난 몽환을 추구하는 뉴에이지음악, 술등의 물체를 기피하고(무언가 명증하지 않다)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이소라의 중성적인 말투(여성의 목소리라 보기에는 너무 멋있다), 검증되지 않은 그 여가수의 먹고 드러눕는 취미를 혐오했다. 게다가 도가니탕에 이르면 더 가관이었다. 유희열은 가지의 색이 보랏빛을 띄고 있어서 그것을 먹지 않는다고 하지만 나는 이렇게 희끄무리, 허여멀건, 허여죽죽한 사르트르의 '벽'을 연상시키는 완전히 흐리지도, 암담하지도 않은 부류의 도가니탕, 곰탕, 꼬리곰탕, 잡뼈국, 따로국밥 등의 것을 쳐다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원초의 울렁거림이 작용할 뿐이었다. 내가 일시에 정신이 노래지고 토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드는, 빌어먹을 소재들을 수연 씨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윽고 난 조촐한 밥상을 차렸다. 물론 신지 것도. 그녀는 오늘따라 식성이 매우 좋아 보였다.

<신지야, 많이 먹고 키도 쑥쑥 자라거라.>

애완견에게 키가 어디에 있겠는가. 너무 혐오감 언저리에 머물러 있더니 결국은 죄 없는 그녀에게 뭐라 알지 못할 말을 지껄였다. 그리고 결국 식성이 좋아보인다는 나의 생각은 착각이 되었다. 깨끗이 비운 나의 밥그릇과 국그릇과는 별개로 그녀의 먹이 그릇은 이번 끼니도 도가니탕이라는 거추장스러운 장애물 때문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실(失)한 나의 그릇과 나의 두툼한 배. 그녀의 우락부락한 얼굴과 귀여운 먹이 그릇이 한꺼번에 오버랩되면서 난 신지를 닮은 수연 씨를 설거지도 안하고 생각해 본다.

 

2. 기 대

<강이 씨, 오늘도 오셨네요!>

<네, 네>

나는 언제나 그렇듯이 "NORWEGIAN WOODS"의 문을 지렁이처럼 삐걱대는 그를 본다. 나는 항상 새로운 햇김치를 맛보는 심정으로 맛깔스런 지렁이를 대한다.

<저기, 강이 씨!>

<네?>

그것은 한참만에 떨어진 울림이었다.

<우리 집에 와서 매일 매상만 올려주고 가는 것도 좋지만 이젠 취직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 네.>

나는 반사적으로 최강, 그의 이름을 서너번 마음속에 작성한 후에 지렁이가 죽을 사(死)자를 쓰는 대학 死학년의 관문을 보기 좋게 기어 나온 것을 알아차렸다. 그런 지렁이의 눈은 어딘지 모르게 무언가에 굶주린 듯한 갈망과 아쉬움이 교차되어 보였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벌써 한 삼십 분쯤 지났다"고 느낄 정도의 삼십 초가 지나갔다. 나는 지렁이의 지루한 눈에 금새 식상해졌다.

<신지 아니, 수연 씨, 아이스커피 주세요.>

다행히도 내가 상투적인 말을 하기 전에 지렁이가 먼저 대답해 주었다. 나를 신지라고 부르는 착각까지 포함해서 만일 그런 불행한 프레이즈가 이어졌다면 그것은 벌써 한 달포.

그리 차지 않다는 느낌의 아이스커피를 타 주었다. 지렁이는 오늘도 나의 정성을 후줄근하게 무시한 것 같다. 댄스 그룹의 연습실에 달려있을 법한 벽면의 커다란 전신거울을 언제나 응시하고 있는 시간이 아까워서 아이스커피 따위엔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하하, 지금은 1월이고 2001년인데 왜 지렁이는 겨울 내내 겨울잠을 자면서 애꿎은 아이스커피 만을 희생시키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순간, 난 따가웠다. 어렸을 때 물 묻힌 손으로 전기 제품을 잘못 만져서 감전된 것과는 다른 느낌의 따가움이었다. 갑자기 난 지렁이가 그렇게 좋지 않은 눈으로 나를 보고 있다는 의식에 사로잡혔다. 나는 지렁이에 대한 인간애, 또는 인과관계에 따라, 혹은 자율신경계의 반응에 의해 자연스럽게 얼굴이 달아올라 홍조를 띄게 되었다.

<수연 씨는 아직도, 미도리 좋으세요?>

지렁이가 그의 아가리를 벌리기 시작하는 바람에 난 내 홍당무가 집어삼켜지는 줄 알았다.

<아마, 제가 가게 이름을 바꿀 때까지는 그녀를 좋아하게 될 거에요.>

지렁이는 썰렁한 분위기를 잠시 잠재운 뒤 다시 거울을 보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라도 지렁이와 관계된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NORWEGIAN WOODS"를 떠올렸다. 대학교 1학년 “교양국어” 기말고사에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에 대한 문제를 못 풀어서 C 학점을 맞던 기억. 도대체 그 소설이 뭐길래, 하면서 감동없이 수십번 읽어버려 하루키의 다른 소설은 몰라도 그것만은 묘파해버린 것. 특히 미도리가 마음에 들어 졸업 후 "NORWEGIAN WOODS"로 카페 경영을 하게 된 후 지금의 상황을 슬라이드 필름처럼 생각해 보았다.

<신지, 아니 수연 씨, 커피 잘 마셨습니다.>

우렁차다고까지 할 지렁이의 목소리가 스쳐왔다. 아, 오늘도 지렁이와의 미팅은 종료구나! 입장, 그리고 한 번은 의도적으로 신지라고 부르는 말투, 다음날 또 올 것을 확증하는 퇴장까지. 한 달 동안이나 계속되는 지루한 촬영이 민방위 훈련처럼 너무나 무관심했다. 하지만 갓 구워낸 패스츄리처럼 어딘지 새롭고 신선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지렁이는 나에게 관심이 있는 것일까?

 

3. 생 활

얼마가 흘렀을까. 수연 씨와 결혼하는 꿈을 꾸다가 도가니탕을 먹던 국그릇에 걸려 잠에서 깨어났다. 주위를 둘러보니 신지는 배고픔에 못 이겨 억지로 "스윗한 도가니탕"을 우겨 넣은 듯 해 보였다. 나는 속으로 외쳤다. "에라, 지금은 이렇게 취직도 못하고 집에서 놀고만 있지만, 이름처럼 최강의 직장, 수연 씨 같은 최강의 여인도 사로잡을테다!" 그리고는 마치 추진의 포탄 같은 양 그릇을 움켜잡고 설거지를 했다. "벌써 한 달째야! 취직도, 수연 씨 카페에 매일 찾아가 그녀를 돌아보는 것도, 매번 기계적인 대화만... 이제는 사나이다운 삶을 살아야 될 것이 아니냐!" 나의 행동의 릴이 어느덧 설거지에서 집청소로 옮겨가고 있었다. 청소하니까 생각나는 건데 나에게 신지의 뒷처리는 가장 큰 고역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어쩐 일인지 아무데서나 뒷일을 보지 않았다. 나는 고해성사를 받은 사람처럼 거룩해졌다. 그녀의 행동이 나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나는 깨끗해진 방에서 "너에게 나를 바친다"를 반복한다. 노래가 끝날 때마다 그를 축하해주는 비누방울 다섯 개를 만들면서 갑자기 행복해졌다.

그러니까 나는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난 미륵이다.>

행복해진 내 마음 옆에서 궁에 인형이 말했다. 그것은 다행히 내가 아닌, 피카츄인형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래도 말을 안 듣다니, 여봐라, 철퇴로 이 놈을 쳐 죽이도록 하라.>

<네.>

트위티인형이 궁예인형의 안대를 뽑아 피카츄인형을 마구 내리쳤다.

<어, 어, 으악, 앗싸, 오로로, 나는야 신바람 E박사, 좋아좋아좋아좋아>

울트라캡숑슈퍼초보라이어티쇼킹어드밴처스펙타클황당무계유치명랑엽기발랄토이스토리풍 동화구연도 이제 지쳤다. 난 내 의지와 상관없는 말을 지껄일 뿐이었다. 도대체 뭐가 좋은 건지. 뭘 보고 좋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희비극처럼 갑자기 앤틱해졌다.

딩동.

올 사람도 없는데. 난 1초라는 그 짧은 동안 괴테의 연인 살롯데가 나에게 속달등기 우편 혹은 때늦은 연하장이라도 보내준 내용의 벨소리이기를 바랬다.

<누구세요.>

<나야.>

<돼지, 아니 민선이구나. 어서 들어 와.>

<오빠. 또 돼지라고 했지? 으이구, 나 살 많이 뺐다니까. 오빠 덕분에 이제 나 53kg이다. 친구들 다이어트 해도 맨날 꼬나박는데 난 오빠가 나 살 빼라고 해서 이렇게 살 뺀거다. 풋, 나 같이 애인 말 잘 듣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그래.>

그래, 그건 헌신이고 사랑, 아니 인간애와도 비슷하겠지. 하지만 왜 네가 나 같은 무능력자를 얼굴과 몸매만 믿고 덥썩 사귀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먹이를 잡으면 놓치지 않는 강태공처럼,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을 믿고 불타는 인내력을 발휘하는 나무꾼처럼 대단하면서도 무섭고 비장하구나, 라는 생각을 가지며.

<오빠, 일자리는 구했어?>

민선이 사온 꼬리뼈를 커다란 솥에 담으면서 말을 하는 바람에 잘 못 들은 것 같았지만 대충 이런 말 아니었을까?

<오빠.>

<아니, 원서는 많이 넣고 있는데, 면접 보러도 많이 가는데, 잘 안 된다. 이번엔 방송사에 넣어봐야지.>

그 말을 들었다는 듯이 대답만 간단히 하려 했는데 조금 오버해서 희망사항까지 덧붙여 버렸다.

<으이구야, 잡지 기자도 안 되면서 방송 기자? 오빠같이 느긋해서리 잘도 마감 지키겠다.>

돼지의 횡포, 저금통 구멍을 내고 싶었지만 사실이었다. 나는 파를 송송 썰어서 따로 봉지에 넣고 있었다. 조금씩 끓여 먹을 때 넣기 위해서였다.

<삐졌어? 바부팅. 이름만 최강이지, 맨날 소심해가지고, 소심남아!>

민선이 꼬리뼈를 만졌던 손으로 내 얼굴을 문대고 있었다. 소의 온기가 온몸에 퍼지는 듯 했다. 솥을 미열 위에 올려놓고 돼지가 자신의 언어를 꿀꿀거리는 것을 들었다.

<내가 오빠에 비하면 쪼끔 아깝긴 하지만 그래도 오빠가 좋아. 오빠의 무언가가 좋다는 게 아니라, 그냥 오빠가. 주위 사람들이 막 걱정하고 그래도 난 오빠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시금 돼지가 울었다.

<내가 기도할게. 오빠 취직도 하고, 우리 결혼해서 잘 살 수 있기를.>

 

그리고, 그녀를 안았다. 이렇게 하는 게 가장 좋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내린 내 마음의 위무였다. 사랑하는 나의 커트. 난 민선의 원천, 그것을 슬며시 매만졌다.

 

정말 미안해.

 

이 말이 입 밖에 나오려는 찰나.

멍, 멍, 으르르르.

<신지야~ 배고프니? 내가 밥 줄게, 착하지?>

난 재빨리 나의 금고를 푼 뒤 신지를 금고에 채워 넣었다. 신지는 내 혀로 나의 볼을 애무해주었다.

<오빠, 그러고 보니 조금 이상하다. 평소에는 좋아하지도 않는 도가니탕, 꼬리곰탕을 끓이질 않나. 애완견을 흠모하질 않나. 기절했던 적도 없는데 이렇게 사람이 바뀌나?>

<그러게 말이다, 이게 다 내 마음을 반성하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서이지.>

보기 좋은 말로 데코레이션하긴 했지만 돼지의 육감은 날 압도했다.

<그랬으면 오~죽 좋겠느냐마는 내 느낌은 그게 아니라는 거지. 아, 나 다시 회사 가봐야 하거든, 일거리가 많아서.>

<아, 그래, 들어가 봐라. 바래다줄게.>

그러고 보니 지금 2시가 넘었다. 그러고 보니 민선은 자신의 점심시간을 송두리째 나에게 헌신하였다.

<오빠가 버스 옆에서 뛸거야, 아니면 택시운전사가 될거야? 하하, 나 오빠한테 말도 안 하고 차 사진 않을 거니까 걱정 마. 면접이나 가셔. 어쨌든 고마워.>

어떤 에세이도 이렇게 친절하게 서론부터 결론까지 죄다 제시해 주지는 않을텐데. 나는 그러라는 말밖에 나의 분량이 남지 않음을 간파했다. 사라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난 수연의 생각에 갑자기 혼란스러웠다.

 

4. 상 상(1)

<수연 씨, 우리 영화 보러 가요!>

나는 최강의 프로젝트를 실행하기 위해서 무차별적으로 발음연습을 했다.

<수연 씨, 우리 영화보러 갑시다. 아, 이게 아닌데. 수연 씨, 아잉~>

이런 얘기 무척 처량하지만 나는 무척 상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기필코! 꼭 말하고야 말리라! "NORWEGIAN WOODS"로 향했다. 원래 이 카페는 좀 어두우면서 그로테스크한 분위기가 있었는데 오늘따라 이 소설처럼 더 암울해 보였다. 아니, 암울했다.

멍.

지금 그의 문 앞에 보이는 것은 수리공의 모습들.

<여긴 페인트로 칠해주시고요, 아! 이건 내버려두세요. 그리고... 어, 강이 씨!>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한 아름 들고 있는 소녀처럼 미소짓고서 수연 씨가 말했다.

<오늘은 아이스커피 대접이 힘들 것 같네요. 저희 가게, 내부수리 중이거든요. 켁켁, 냄새가 지독하죠? 한 3일 정도 내부수리 때문에 영업을 못하게 되어서 무척 죄송하네요.>

"그럼 그 기간동안 우리 차나 한 잔 해요." 식의 언어를 말해야만 한다. 제발.

<어머, 강아지가 무척 예쁘네요, 그것도 제가 제일 좋아하는 하운드 덕이에요! 착하지, 이리 온~ 아, 강이 씨, 강아지 이름이 뭐예요?>

순간, 난 신지가 허락도 없이 내 뒤를 쫓아왔던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 시, 시, 신지요. 신지야~, 신지가 냄새 때문에 괴로운가 봐요.>

윽, 내가 왜 말을 더듬지? 이럴 상황이 아냐, 이게 아니란 말이다.

<아이고, 그럼 가보셔야 겠네요. 저는 오늘 강이 씨와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말이죠, 큭>

얻어 맞은 것 같았다.

<그렇게 한 달 동안 저를 빤히 쳐다보셔서 굉장히 궁금했거든요. 아니, 이왕 이렇게 된 거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저 강이 씨에게 데이트 신청하는 거에요. 한 달 동안 거울로 저를 보아주신 댓가로.>

그러니까 두 팔 달리고 두 다리 달린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 같으면 이와 같은 상황을 날개달린 듯 좋아해야 한다. 그러나 난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내 계획은...

 

“무슨 일일까? 강이 씨가 날 보자고 하네.”

나는 지렁이가 한 달하고도 사흘만에 나에게 진실을 말하는 입을 연 것에 대해 눈물이 알 정도로 감격했다. 그것도 아주 특별한 듯한 콘서트 현장으로 날 불러내다니, 어딘가에서 본 듯할 정도로 진부하긴 하지만 오늘 지렁이가 무슨 말을 하든 동요하지 않으리라.

콘서트 장은 어두웠다. 나는 쥐새끼조차 범접하지 못할 것 같은 공간에서 혼자라는 것을 알았다. 마치 Brain Crain의 음악 같은 환상, 환각, 환청, 환치, 환멸 등이 한꺼번에 들어있는 것 같은 무대는 그 틀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육감적으로 지렁이가 날 보며 어딘가 그만의 언어를 꿈틀거릴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탁.

그런 소리라도 났으면 덜 감동적이었을텐데 소리없이 무대의 불이 커지고 지렁이가 날 보며 약간은 어색한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둘도 없는 내 여인아

보고 또 보고 자꾸만 봐도

싫지 않는 내 사랑아

 

그것은 차라리 시(詩)적인 시(視)였다. 지독하리만치 단순한 메커니즘, 포드주의지만 나는 거기에서 지렁이가 주는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그만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그가 삑사리를 내든, 어설픈 목소리를 내든. ‘그것은 논외의 문제로 하고’라는 대학시절 내가 보고서에서 자주 쓰던 문구가 지금의 상황과 전혀 상관없이 자꾸만 내 머릿속 어딘가를 횡행하고 있었다.

 

수연 씨. 처음 본 순간부터 당신에게 푹 빠져버려서 헤어나올 수 없는 저를 용서하세요.

 

5. 상 상(2)

이렇게 되어야만 했다. 아니면 수연 씨를 지하철로 데리고 가서!

 

<할 말 있다더니 추운데 왜 지하철 앞에서 보자고 하셨어요?>

<추우시죠? 그럼 따뜻한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지렁이가 이번엔 동문서답이다. 쳇, 지하철 밖이나 안이나 춥고 꾀죄죄한 향정신성의약품을 맞은 환자같이 외로울텐데. 한 번만 속아주는 거지.

<어디 가시게요? 혹시 절 유괴하거나 납치하는 건 아니겠죠?>

농담은 확실한데 왜 상황은 이리도 기괴하게 맞아 돌아가는 건지. 나는 나의 고무줄을 끊고 날 아이스께끼 한다고 내 치마를 들어올린 지렁이의 낯짝을 문들어 주고 싶었다.

<이것 봐요, 여긴 우리 동네이고 지금은 10시가 넘은 시각이라고요. 왜 강이 씨는 이상한 데로 가려는 거죠?>

그러고 보니 조금 감정이 뒤엉킨 이 말에도 지렁이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이것 봐요.>

끝물의 승객들에게 지렁이는 “시일야방성대곡”의 장지연처럼 거룩하고 비장한 태도로, 옥상에서 소리지르는 모 프로그램을 연상시키는 철저하게 무식한 강렬함으로 내리쳤다. 지금까지의 지렁이가 너무나 많이 밟혀서 내장과 늑골이 다 보이는 것처럼.

 

승객 여러분!

제가 이 자리에 선 것은

제가 이 옆에 서 있는 수연 씨를 짝사랑한다는 것을

여러분께 알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너무나 부족하고 나약하지만

저 최강은 우리 이쁜 수연 씨를 사랑합니다.

수연 씨! 제 사랑을 받아주세요!

그것은 “철도원”에서 호로마이 역으로 정시에 도착하는 열차처럼 정확한 예지의 부산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렁이의 투칼라 저글링 러쉬 때문에 난 멍하고 어안이 벙벙했다. 잠시 후 사람들의 박수소리가 들리고 난 뭔가 지렁이에게 말하고 싶었으나 정신이 아득하고 황망해져서 그럴 수 없었다, 그것은 어떠한 비유로도 설명 불가능한, kiss...

 

6. 현 실

또 이렇게 했어야만 했다. 이렇게 나의 시나리오가 무위로 돌아가면 나의 7496개의 시나리오를 못 펴게 되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난 수연 씨에게 갑자기, 이유 없이 화가 나기 시작했다. 지금은 이 화를 억지로 잠재우는 중이다.

<감사합니다. 신지도 괴로워했는데. 같이 데려가 달라고 하네요.>

<그럼 요 앞 커피숍으로 같이 가요. 아저씨들, 잠깐 바람쐬고 올테니 수고해 주세요!>

 

커피숍은 예상대로 은성한 흑인 중산층의 저녁식사였다. “NORWEGIAN WOODS"와는 또다른 귀족주의적 멋스러움이 도처에 팽배해 있었다. 귀족적인 분위기가 차마 덜 깨어진 나와 수연 씨를 중독시키고 있었다. 수연 씨는 여기가 가장 전망 좋은 자리라며 나를 안내했지만 이 자리는 가장 깊숙한 자리일 뿐더러 경치도 보이질 않았다. 게다가 다른 손님에게 어지간한 말소리도 들리지 않는 이상한 곳이었다. 난 조금 이상했고 더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수연 씨, 저 깨어나고 싶지 않아요.>

<하하, 그게 무슨 말이죠?>

<이 커피숍, 남작들이 기어나올 것 같아요.>

<네, 좀 특이하긴 하네요. 강이 씨, 게다가 여기 커피 죽이는 것 같아요.>

내가 아까 전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려 했던 분노가 여기에서 또 아무 이유 없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였다. 그녀는 철저하게 나의 라이프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나 난 혹시라도 잘못되었을 나의 판단에 다시금 온유해지기로 했다.

<기자하시려면 신문방송 전공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강이 씨는 행정학 전공한 걸로 알고 있는데.>

<아, 꼭 그런 건 아니에요. 저는 방송계의 직업이 모두 전공자유형이라 생각해요.>

큭.

그 어떤 수식어도 없는 커피조각 두 잔이 십자수를 놓은 식탁보 위에 펼쳐져 있었다.

<강이 씨, 괜찮으세요? 천천히 드세요. 체하지 말고.>

왜 오랜 시간이 흘렀다. 서로의 커피조각도 위장 아래에서 유명을 달리하였다. 난 그녀의 어색한 밝음과 자연스러운 어두움을 연결할 자신이 없었다. 또한 지나치게 나와 자신의 껍데기만을 집착하는 게 역겨웠다. 내가 그녀를 한 달간 보아온 것은 그녀가 아니었다. 난 낡은 컬러감으로 얼룩진 그녀만 보았을 뿐, 지금까지의 그녀에 대한 내용은 3류 연애 시뮬레이션게임에도 미치지 못하는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것이다.

펑.

분노는 폭발하였다.

우리 일어나죠.

그녀는 잠시 놀라는 듯 하더니 날 서둘러 앉히는 눈빛을 보내왔다.

강이 씨, 할 얘기가 있으니까. 바쁘더라도 잠깐만 앉아주세요. 저, 사실 강이 씨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오라고 한 거였거든요.

난, 이 겉 같은 여자에게 마음씨 넣는 숙부가 되어야 하는가. 하지만 몸은 마음의 뜻을 거절했다.

저, 사실 강이 씨에게 너무나 고마웠어요. 한 달 동안 저희 가게 매상을 올려 주시고. 한 동네 살아오면서 정말 큰 힘이 되었어요.

벗기려면 쉽사리 벗길 수 있을 것 같은 피부를 가진 여자가 내 앞에서 수줍은 보조개를 드러냈다. 누군가가 나에 대해 이다지도 감사해 하다니. 내가 날 지탱해온 가치들은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딸의 순결을 사수하는 하릴없는 아버지의 꼬장꼬장함 같을 뿐이었는데. 난 잠시 겉과 속이라는 낱말을 헛갈려 했다.

저, 부탁이 있는데.

불경스러운 우아함과 유기농 정원을 갖고 있는 촌스러운 부인의 이미지를 동시에 갖고 있는 여자가 갑자기 내 옆으로 오고 있었다. 난 갑자기 아득해졌다.

강이 씨, 한 달 동안 나를 바라보는 눈빛, 나에게는 너무나 견디기 힘든 순간들이었어.

깜짝.

그녀가 갑자기 나의 바게트를 조심스레 주무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순간만큼은 진리를 머금은 눈으로 모든 모호함에서 Esc할 수 있게 되었다. 난 걱정스럽게 예상치 못한 돈쥬앙의 반응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무슨 수를 취해야 할텐데. 난 잠깐 신지를 보고 있었다.

섹스하고 싶어.

그리고는 딱딱해진 바게트를 더욱 심하게 주무르려 하였다. 난 그녀가 갑자기 괴수만화에 나오는 악당같았다. 아니, 악당이었다.

이러지 말아요. 이러면, 수연 씨.

난 악의 무리를 발본색원하기 위하여 다짜고짜 그녀의 방어막을 뚫으려고 했다. 평소라면 그랬겠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단순히 “난 살이 닿는 게 싫어,” 같은 말로는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없다.

가만히 있어. 터져버리기 전에. 지난 날 니가 얼마나 날 미치게 했는 줄 알아? 널 놓치지 않을거야.

멍, 멍.

신지마저 나의 화를 돋우고 있었다. 난 그녀가 나의 팔을 너무나 세게 잡고 있어서 빠져 나오기가 쉽지 않았지만 안 따지는 병뚜껑을 따는 기분으로 신지마저 내 버리고 카페 문을 향해 전력질주했다.

야.

그녀의 목소리가 접시 열 장을 대리석에 깨버린 것 같았다. 난 문 앞에서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모든 손님과 종업원은 우릴 향해 얼어있었고 우리는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서로를 돌아보았다. 이제 수연 씨는 헝클어진 머리에 반쯤 벗겨져 보이는 배구공과 벗겨진 구두 한 짝 때문에 누가 보아도 공인할 흉측한 몰골을 하고 나에게 삽시간에 다가오고 있었다.

이것 봐, 넌 미쳤어. 넌 제정신이 아니라고.

이런 생각들은 허공에 스칠 뿐, 난 이 말을 달아나는 그 길에 살포시 뿌리고 있었다, 나를 등지는 바람은 아쉽게도 그녀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신경쓸 겨를이 없어서 눈치를 못 채고 있었는데, 어느새 눈이 오고 있는 겨울 풍경은 처절했다. 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상형에 대해 불신하게 되었다.

난 왜 이리 꽝만 걸리는 거지?

직장도. 사랑도. ‘나’도.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상만 한데 뒤엉켜 내 마음은 쑥대밭이 되고 있었다. 저기 ‘내부수리중’이라는 표시가 보이는 "NORWEGIAN WOODS"를 보고 난 휘청거렸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집인데, 멀리서 민선의 모습이 보였다. 추운데, 눈이 오는 풍경과 그녀는 너무나 닮아있었다. 그녀가 멀리서 뽀드득하는 소리가 나인 줄 알고 날 향해 크게 소리쳤다. 아마 날 부르는 소리 같았다. 나는 지금까지의 감상과 민선의 모습을 보며 다시금 다리의 힘이 풀리게 되었다. 난 철썩 주저앉아 주루룩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것도 너무나 서글프게 엉엉 소리까지 내며.

<오빠, 무슨 일이야? 이 바부팅. 오빠 옆에 내가 있는데. 누가 오빠 눈에 눈물 흘리게 한 거야? 씨, 내가 잡으면 혼내줄거야. 근데 왜 이리 나도 슬프지?>

그러면서 민선도 내 옆에 같이 앉아 날 보듬고 우는 것이었다. 하늘도 이들을 사랑하는지 눈은 점점 진눈깨비로 바뀌고 있었다.

<나, 앞으로는 이소라 노래도 안 듣고, 희끄무리한 국도 안 먹을 거야, 절대 안 먹는다고, 안 먹어, 안 먹어, 안 먹어...>

 

7. 사 족

저 멀리서 어떤 이갈리는 여자가 지렁이를 붙들고 안고 있다가 그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나는 보고 있어. 저 여자, 날 흉폭하게 만들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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