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

  "누구? 다카시니?"

  엄마 목소리였다. 원래대로 돌아온 것이다. 나는 정말로 기뻐 현관으로 뛰어 들어갔다.

  "다녀왔습니다!"

  큰 소리로 인사하며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발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콘크리트 바닥에 발이 들러붙은 것처럼.

  "무슨 일이니? 왜 이렇게 늦었어?"

  엄마가 현관 쪽으로 나왔다. 나는 대답을 하려고 했다. 그 순간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왜 그래? 빨리 들어오지 않고."

  엄마가 다시 한 번 말하면서 이상하다는 얼굴로 내 쪽을 바라다보았다. 그러더니 '꺅' 하고 크게 비명을 지르며 내 발 쪽을 가리켰다. 나는 천천히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아,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옅은 회색의 물방울 같은 모양으로 내 다리가 녹아내리고 있는 것이다.

  "무슨 일이야?"

  아빠가 나왔다. 아빠도 '앗'하는 비명과 함께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여전히 부들부들 떨면서 녹아내리고 있었다. 발에서 무릎, 그리고 허리까지 녹았다. 나는 점점 인간의 형태를 잃고 쪼그라들면서 아까 보았던 해파리 귀신 같은 모습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입을 딱 벌린 채 눈이 휘둥그래져서 경악하는 엄마 아빠의 모습이 마지막으로 얼핏 내 눈에 비쳤다.

 

 - 『아빠가 많아졌다』, 「어디로도 갈 수 없는 길」, 미타무라 노부유키 글, 사사키 마키 그림, 김버들 역, 한림출판사, 2011, pp.47~49.

 

 

 

  동기는 단순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던 사사키 마키의 그림이 반가워서 이 책을 집었다. 바로 이 『아빠가 많아졌다』. 전에 블로그에서 소개했던동화창작법』에 예화로 나왔던 책이기도 했다. 고백하자면 난 미타무라 노부유키를 몰랐다. 단지 특정 책에 인용이 될 정도의 책이라면 함량이 높은 책이라는 기대와 확신만 가졌을 뿐이었다. 가볍고 밝은 동화책이겠거니, 초등학교 고학년이 읽는 책이라면 글자수가 조금 많겠지, 라는 생각으로 부담없이 한 글자 한 글자 읽어나갔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 책은 달랐다. 읽을수록 무겁고 어렵고 부담은 더해갔다. 쉽게 말하자면 어린이 버전(?)의 '기묘한 이야기'를 읽는 느낌이랄까. 이 책을 이루는 다섯 편의 단편 동화(「꿈에서 만나요」,「어디로도 갈 수 없는 길」, 「나는 5층에서」, 「아빠가 많아졌다」, 「벽은 알고 있다」)는 저마다 이야기가 다르지만 모두 다 초현실적인 사건을 다루고 있다. 현실 속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 다섯 가지가 다섯 편의 단편 동화에 담겨 있는 셈이다.

  이 책을 다 읽고 정신이 어지러워진 나는 책 말미에 나온 평론가의 '작품 해설'을 읽었다. 이 평론가는 작품의 속뜻을 이렇게 보았다.

 

 

  하지만 저자는 단순히 초현실적인 사건을 다루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초현실적인 상황 설정을 통해 현실의 불확실성을 상징화하면서 인간은 누구나 혼자 태어나고 혼자 죽어 가는 존재라는, 고독하고도 냉혹한 사실을 깨우쳐 줍니다.

 

(- 같은 책, pp.211)

 

 

  평론에 대한 반론. 나는 이 문구를 보면서 '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어,'는 생각을 했다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일단 이 책은 초등학교 고학년을 대상으로 상정해놓고 풀어 쓴 동화다. 그런데 이런 '범상치 않은' 글을 읽고 어떤 애늙은이 같은 초등학생이 고독하고 냉혹한 현실을 직시할 수 있겠는가. 난 그냥 저자가 아이들이 잘 때 꾸는 꿈을 해석의 과정 없이 나열하는 기법을 사용했다고 생각했다. 진짜 고독한 인간, 인간의 불확실성 등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면 이 책은 어른들을 위한 소설로 출간되어야 하지 않았을까. 아이들(어른들도 마찬가지겠지만)이 꾸는 꿈이란 '꿈속의 나'와 '꿈을 꾸고 있는 나'가 혼재되어 있을 수도 있다. 또 '나'가 위의 예문처럼 괴물 해파리 같은 연체동물로 변할 수도 있다. 아빠가 많아져서 세상이 온통 혼란을 겪을 수도 있는 것이다. (써놓고 보니 악몽에 가깝긴 하지만)

  아니면 요즘 아이들 수준이 워낙 높은데 그에 반해 나만 아이들이 인생무상이라는 개념을 모를 거라고 착각할 수도 있겠지. 하긴 요즘 고독한 현실에 처한 아이들이 적지 않다. 부모님은 늦게 들어오시지, 터놓고 이야기할 친구는 학원에 가야 있지, 그나마 늦게 들어오는 부모님도 사망이나 이혼의 이유로 없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현실까지 간파한 채 이 글을 썼다면 저자는 더 대단한 글쟁이다.

  요컨대 이 책은 한국의 현대 동화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는 트렌드생활동화의 작법을 정통으로 비껴간 '조금은 어두운 판타지 동화' 쯤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혹시 이 책을 보실 분들은, 표지에 그려진 사사키 마키의 단순체를 보고 밝은 가족의 이야기라 생각하면 안 돼요, 큰 오산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 이런 책을 쓴다면 동화 카테고리에 들어갈 수나 있을까, 하는 의문은 든다. 어쨌든 내게는 동화 습작에 있어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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