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9일

  그 여자아이는 어떻게 됐을까? 그 뒤로 전혀 오지 않는다. 가끔 여기를 지나다닌다고 했는데, 벌써 2주 동안 안 보였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는 마치 신데렐라처럼 시간을 걱정하면서 돌아갔다. 붉고 푸르스름하게 온화한 빛을 내는, 생전 처음 볼 만큼 커다란 은색 버스는 금세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신사 끝에서 끝으로 갈 정도의 사이였다.

  정말 이상한 여자아이다. 이상한 점은 그 아이의 옷이나 들고 있던 물건뿐만이 아니었다. 이야기하는 것도 어쩐지 별났다. 내가 들어 보지 못한 말을 많이 알기도 했지만, 별것 아닌 걸 모르기도 했다.

  마치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도 그 아이가 어디에 사는지,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것도 이상했다.

  내게는 그 아이가 마치 어디 다른 나라…… 아니, 다른 별에서 온 것 같다. 이 지구와 똑같은 별이 어딘가에 있고 나 같은 여자아이가 살고 있는…… 그 별에서는 모두들 훨씬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다. 맛있는 걸 먹고 멋진 집에 살고 따뜻한 옷을 입고 있을 것이다. 전쟁 같은 것도 당연히 없겠지.

  아마 그럴 것이다. 이제 그 아이는 자기 별로 돌아갔겠지.

 

 

  1954년 1월 9일

  아는 사람들 때문에 새엄마가 올지도 모른다. 정말 쓸데없는 참견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우리 엄마는 어떻게 될까? 이제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게 아닐까?

  엄마를 단념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다시 엄마를 만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별로 돌아간 소녀야! 부탁이니까 꼭 다시 와 줘. 나를 구하러……. 다시 한 번 엄마를 찾으러 함께 가고 싶다. 그럴 수 없다면 나에게 혼자 갈 수 있는 용기를 줘.

 

 - 『별로 돌아간 소녀』, 스에요시 아키코, 이경옥 역, 사계절, 2008, pp.169~170.

 

 

 

  별일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 분주한 일상을 쪼개어 나는 그저 쓰고 싶었다. 그런 저런 쓰고 싶은 것 중 하나를 여기서 풀어보려 한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생소하겠지만, 나는 스에요시 아키코의 판타지 동화인『별로 돌아간 소녀』에 대해 쓰고 싶었다.

  이 책을 고른 이유에 대해 말하기 전에 한 가지 짚을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나의 독서 스펙트럼이 그렇게 넓지 못하다는 것이다. 나는 오늘처럼 오랜만에 휴가를 얻어 한가한 날이나, 일을 하던 중이라도 점심시간을 이용해 정독도서관 같은 장서가 많은 도서관 어린이실에 턱하니 들어간다. 그리고는 창작동화 코너에 쳐박혀 있으면서 명작동화전집 중 몇을 고르거나 '제목이 판타지스럽다'든가 '재미있을 것 같은' 동화책, '그림이 예쁜' 동화책을 무작정 집고 읽는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막말로 어떤 일이 체계적으로 진행되는 게 몇이나 있을까. 솔직히 내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선택은 무작정 이루어진 것이 많았고, 마구잡이로 이루어지는 의사결정이 독서의 경우라 해서 문제가 될 것은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지은이가 내가 아는 사람이라면 보증수표로 알고 확신을 갖겠지만, 지은이를 모르지만 출판사는 명망있다고 해도 믿고 읽는 편이다. 결국 내 손아귀에 들어오는 책은 정통 한국식 생활동화나 서양 혹은 일본식 판타지 동화로 모아진다.

  사람들은 내 취미는 독서고 특기는 글쓰기라(고 하고 싶다)고 하면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곤 하지만, 그것은 별스러운 일이 아니다. 내가 독서나 습작을 하는 것은 그냥저냥 굴러들어온 책을 읽고 차오르는 말들을 내 방식대로 꺼내는 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책(『별로 돌아간 소녀』)도 그런저런 흐름으로 내 앞에 굴러들어온 책들 가운데 하나다. 계속 동화나 수필 분야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단지 『아무도 모르는 작은 나라로 유명한 사토 사토루의 추천글을 통해 그 선택이 확고해졌을 뿐.

  이 책은 기발하다. 판타지 동화는 기발하지 않으면 그 가치가 퇴색되어버리기 때문에 신선하고 기발한 것이 필수 요건이라 생각한다. 이 책은 '시간여행'이라는 소재를 뻔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다루고 있다. 그 수법이 능수능란하다는 점이 배울만 하다.

  또 이 책은 편안하다. 판타지가 편안하다는 건 쉽지 않다. 편안하다는 것은 순수하게 작자의 출중한 역량이 발휘된 결과다. 이 책은 판타지 동화긴 하지만 그 뿌리는 명확한 현실에 두고 있다. 갈등 요소도 가족, 우정 등을 이야기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할 정도로 탄탄하다. 그렇기 때문에 판타지를 이야기하다가도 현실로 돌아오는데 전혀 무리가 없고 자연스럽다. 쉽게 말하자면 기름기를 쫙 뺀 담백한 고기맛이 난다고 할까. 판타지라면 경극 화장처럼 화려하고 싶을텐데, 어떻게 이런 실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인지 참으로 놀랍기만 하다. 특히 판타지 동화를 쓰고 싶은 내게는 더욱 더.

 

 

  이런 잘쓴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내게 놓인 허들의 양감이 마음 가득 느껴진다. 바빠진 업무로 인해 물리적인 시간은 대부분 약탈당했다. 연봉이 적어서 아르바이트도 해야 하는데……. 피곤하면 내 오감과 감성은 잠에 볼모로 잡혀버린다는 것이 내 최대 약점. 또 짧은 기교만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근본적인 차이는 질적으로 더 확연해진다. 뿌연 창문을 닦으면 닦을수록 창밖에 보이는 낭떠러지는 더 잘 보이기만 하니 어쩌나. 이미 등단하여 수 권의 책을 낸 내 또래의 '젊은' 소설가들처럼 나도 촉망받고 주목받고 싶은데, 주변을 둘러보면 둘러볼수록 더 무섭고 두렵다. 배울 것은 많고 명확해지는데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쫓아갈 수 없다. 가수 윤종신이 인터뷰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나 또한 결핍으로 점철된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만 확고해진다. 결국 난 놀부처럼 욕심만 부리고 종국엔 실속은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어떤 최측근은 이런 나를 보며 '내가 동화를 쓰기엔 살아온 연륜이 부족하다. 그건 기교의 문제가 아니다, 내 동화 습작은 아직 덜 익혀졌다. 오븐에 익힐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차라리 수필을 빙자한 내 낙서들이 자신에게 더 큰 울림을 주었다'고.

  그럼 난 동화를 더 이상 연습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지만 난 윤동주나 기형도 같은 시인도 아니고 백낙청 같은 평론가도 아니다. 어쩌면 난 그 무엇도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그리하여 마침내 내 이름이 한 작가의 브랜드로 쇼윈도에 걸리고 싶다는 욕구는 늘 있다. 많은 고민이 있지만 일단은 쓰고 싶은 글을 계속 써보기로 한다. 어떤 글을 쓰든 내 삶에 작은 오솔길은 계속 있을 거라 믿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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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10. 26.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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