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정치적 또는 문화적 성향이란 건 결국 성격에 의해 형성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성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말이다. 실제로 미국에선 그런 연구도 있었던 걸로 알고 있다. 공화당 지지자냐 민주당 지지자냐 하는 건 성격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성격을 측정하는 도구 중 가장 많이 연구되고 있는 것이 Big 5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MBTI 등이 더 잘 알려져 있어 심리학 전공자들만 아는 도구이긴 하지만 학계에선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이다. 다섯 가지 특질의 정도로 성격을 측정하는 것인데 그 다섯 가지를 줄여서 OCEAN이라고 한다. Openness, Conscientiousness, Extroversion, Agreeableness, Neuroticism의 앞글자를 딴 것인데, 각각의 뜻은 개방성, 꼼꼼함, 외향성, 동조성, 신경증 정도 되겠다. 이 다섯 특질에 대해 측정해 절대 점수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전체 집단 중 몇 %에 속하는지, 즉 백분위로 나타낸다. N 점수가 상위 10%라면 감정이 매우 불안한 사람이라는 거다. 반대로 하위 10%라면 매우 안정적인 사람이라고 하겠다.


Big 5에서 내게 가장 두드러졌던 특질은 Agreeableness였다. 2004년이니까 상당히 오래 전이긴 하지만 당시 A가 하위 3%를 찍었다. 즉 지극히 Diagreeble 하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남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 정도를 넘어서 반대까지 할 것 같다. 내 정치적 성향은 이 낮은 A에 근거하는 게 아닐까 싶다. 즉 주류의 의견에 반대하면서 반보수적인 성향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런데 최근 왜 보수적이 되는 걸까? 그건 아마도 세상이 아닌 주위 의견의 주류가 별로 보수적이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즉 주위의 의견에 반대하면서 또 역으로 가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노무현 생전에 노무현에 대해 극도로 비판적이었는데 아버지가 노빠였던 것도 한 원인이었다.

근데 이렇게 생각해보니 젋었을 때 운동권에 몸담았다가 지금은 뉴라이트에 가있는 사람들이 좀 이해가 간다. 그들도 A가 극도로 낮은 사람들이 아닐까? 그래서 사회에 반발해서 운동권에 몸담았다가, 다시 운동권에 반발해서 뉴라이트가 돼버린 것이다. 그리고 내 기억이 맞다면 나이가 들수록 A가 조금씩 올라가는데, 이제는 A가 어느 정도 높아져서 다시 현재 자기가 소속된 곳의 의견에 반발하지 않게 된 것이다. 헉. 그렇다면 나도 보수우익이 될 수 있다는 건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주의해서 나쁠 건 없지. 무슨 일에서건 균형잡힌 시각이 중요한 것 같다. 책도 너무 치우치게 읽지 말고 말이다. 중용, 중용.

난 문화적으로는 그닥 진보적이거나 개방적이지 않은데 중간쯤인 O에 기인하는 게 아닐까싶다. O가 높은 사람들이 새로운 예술이나 문화를 잘 받아들인다. 예전에 학생 복장에 대해 썼듯이 난 의복에 대해 보수적이고 포스트모던 예술을 싫어한다. 근데 굳이 싫어할 것까진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최근에 들었다.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싫어할 필요는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 불과 얼마 전에 쓴 글이긴 하지만 패션에 대해서도 좀 생각이 바뀌었다. 올림픽 선수들의 자유로운 패션이 꽤 멋져 보였던 게 한 원인이다. 흠, 난 스포츠를 넘 좋아해서 말이지. ^^

하지만 정치적인 관점을 떠나 스포츠에 대한 진보의 주장은 감정적으로 동조하기가 너무 힘들다. 예로 들어 강준만은(아, 이 사람은 진보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80년대에 관해 쓴 그의 책에서 전두환이 국민을 우민화하기 위해 만든 거라며 프로야구를 끊임없이 비판했다. 설사 탄생이 그렇다 하더라도 프로야구가 주는 즐거움은 평가할 가치가 있지 않을까? 스포츠와 관련된 비판적 담론에서 종종 느끼는 건 그 사람들이 조금 더 스포츠 팬이 아닌 것 같다는 것이다. 스포츠 팬이라면 비판하는 와중에도 애정이 은근 드러날 텐데 그런 게 없다. 나의 순수한 즐거움을 외면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상한다.

예전에 언론고시 스터디를 하면서 차와 관련해서도 비슷한 얘기가 나왔던 적이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자동차 및 자동차 산업에 대해 비판하고 있었다. 사실상 자동차의 범람이 인간의 삶을 더 황폐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점에 대해선 동의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멋진 스포츠카 같은 건 한 번 타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한 친구가 비판했다. 그런 건 자연스런 욕망이 아니며 잘못된 것이라고 말이다.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스피드에 대한 욕망이 꼭 자본주의 사회의 왜곡된 욕망에만 근거하는 것일까? 바람을 가르며 빠르게 뛰어내려갈 때의 쾌감 같은 것의 확장 아닐까? 스포츠카를 타고 싶다는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것들의 가치를 고려할 때 그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비판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욕망 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은 다른 얘기 아닌가?

에궁. 무슨 얘기를 하다 여기까지 왔지? 원래는 내 성격을 얘기하려고 했는데 말이지. 다시 한 번 Big 5를 측정해보고 싶다. 이번에는 어떻게 나올까? 그때보다는 A가 높아지겠지?

*추신: 스킨을 또 바꿔봤다. 이전 게 그닥 멋있어 보이지 않아서 말이지.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3. 7.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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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달을 딴 한국 선수들 - 한국은 동계올림픽 역대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다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이 끝났다. 한국은 역대 동계올림픽 사상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다. 메달을 기대하지 않았던 빙속에서 단거리, 장거리에 걸쳐 금메달을 따는 등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이라이트는 세계신기록으로 당당히 최고의 자리에 오른 김연아였다. 그저 보기만 했던 나도 가슴이 떨릴 정도인데 경기에 나서는 선수의 긴장감은 어느 정도였을까? 그런 긴장감과 압박감을 이겨내고 완벽하고 아름다운 연기를 보여준 김연아 선수에게 아무리 찬사를 보내도 아깝지 않을 것 같다.

나는 김연아에 열광했고, 이번 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들이 나선 경기들을 열중해서 보았다. 이런 내가 이상한가? 여기에 딴죽을 걸 친구도 있을 것이다. 나는 한때 상당히 강하게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스포츠 민족주의에 별 거부감이 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지 않은가? 내가 변한 건가? 그렇다, 변했다. 하지만 그 변화의 주된 이유는 민족주의에 대한 호감이 늘어서이기보다는 민족주의 비판 담론의 문제점을 발견해서이다.

기존의 민족주의 담론은 이제 촌스러워졌다. 자체적인 진단이라기보다는 외부의 담론을 그대로 받아들였을 뿐이어서 초점도 어긋난다. 지금은 2010년인데 PD가 NL 비판하는 식이다. 틀에 갇혀 변화하는 모습을 포착해내지 못 한다. 어떤 점이 그런지 살펴보자.

민족주의가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개개 국민들을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그 민족의 사업을 수행하는 '국가'에 '동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2차대전의 총력전이 바로 그런 식으로 이루어졌다. 우리는 매우 가까운 역사를 통해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무차별적인 동원이 이루어지고, 또 잔인한 폭력이 수행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민족주의를 억눌러야 이런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 기존의 담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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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 - 종교나 민족이나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과연 그런가? 문제의 핵심이 민족인가? 그렇지 않다. 문제의 핵심은 '동원'이다. 민족은 사람들을 쉽게 동원하기 위한 강력한 명분 중 하나일 뿐이다. 역사적으로는 폭력적인 사업의 동원 명분으로 종교가 더 자주 이용되었다. 도덕, 가문, 명예 등도 명분이 될 수 있다. 자본주의 시대엔 돈도 명분이다. 즉 문제는 어떠한 명분이든 개인을 무차별적으로 동원하는 매개체가 되면 위험할 수 있다. 굳이 민족만이 문제는 아닌 것이다.

오늘 올림픽에서 한국을 응원하는 사람들을 보자. 한국이 이겼다고 기뻐하고 함께 열광한다. 열광하는 군중들 중 아직 군대 안 간 청년한테 물어보자. "스포츠 잘 하는 한국이 자랑스럽지요? 이 자랑스런 국가를 위해 군대에 가는 게 기쁘지 않나요?" 아마 미쳤냐는 소리 들을 것이다. 그들 중 아무나 붙잡고 조건없이 미국영주권 줄 테니 바로 한국을 떠나야 한다고 말해보자. '얼씨구나'하는 사람들 많을 것이다. 과연 여기 어디에서 국가에 대한 동원이 이루어지는가? 그저 응원에 대한 자발적 동원이 있을 뿐이다.

민족에 대한 지나친 경계는 일본으로부터 수입된 것이다. 그들은 민족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킨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전쟁은 엄밀히 말해 민족의 이름으로 수행된 것이 아니라 '반공'의 이름으로 수행된 것이었다. 물론 독재 정권 하에서 민족은 동원의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의 민족은 저항의 구심점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통일의 명분이기도 하다. 일본의 민족 담론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민족주의 비판 담론의 또다른 한 축은 민족허구론이다. 이는 아마도 서구에서 들어온 개념이 아닐까 예상한다. 민족은 혈연을 근거로 하는데 순혈을 유지한 민족 집단은 없다. 또 민족이란 근대에 들어와 탄생한 개념이다. 따라서 민족은 허구적인 개념, 즉 거짓이라는 것이다. 나는 민족이 순혈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민족이 근대에 들어와 탄생한 개념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게 민족이 허구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민족은 물론 역사적이고 인공적인 개념이다. 하지만 모든 인간 공동체가 다 그렇다. 국가, 회사, 마을, 친족 모두 그렇다. 심지어 가족도 인공적이다. 세계에는 부부와 그 자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가족 관계도 존재한다. 아마 극단적으로 말하면 자연적이고 명백한 인간관계는 모자 또는 모녀뿐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공적인 공동체나 인간관계들이 다 허구가 되는가? 인공적이라는 것, 지역에 따라 다르다는 것, 역사적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 어떤 것이 허구라는 근거가 되지는 못 한다. 그렇게 따지면 물리학의 '원자'조차도 허구가 될 것이다. 원자는 한때 분리될 수 없는 입자였으나 지금은 쿼크라는 더 작은 입자로 쪼개질 수 있는 입자로 여겨지고 있다. 상당수의 물리학 개념은 과학자들이 문제를 명확히 하기 위해 만든 도구적 개념이어서 역사적인 변천을 겪지만 그 유용성이 살아있는 한 폐기되지 않는다. 사실 실체적 의미라는 관점에서 판단하면 '중력'에 비해 '민족'은 엄청 실질적이라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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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의 구조 - 원자의 개념은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

민족은 현실에 존재하는 개념이다. 민족주의 비판자들은 순혈주의를 비판하며 마치 순혈주의의 허구성이 드러나면 민족에 대한 믿음이 와르르 무너질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지만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한민족이 순혈이 아니라는 건 다 아는 얘기다. 족보를 중시하는 우리나라에서 시조를 물어보면 중국에서 왔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내 성도 그렇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여진족이었을 가능성이 꽤 있다. 그래서 뭐 어떻단 말인가? 이런, 우린 한족도 아니고 여진족도 아니고 한민족도 아니네. 이렇게라도 생각한단 말인가? 피가 섞여온 역사와 상관없이 현재 이 땅에서 비교적 동질적인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집단으로서의 민족이라는 개념은 그대로 남는다. 한민족의 피가 순수하지 않다는 것이 이땅에 살고 있는 사람이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장해가 되진 않는다. 나는 오히려 민족주의 비판자들이 순혈주의에 집착한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이다.

민족이 근대에 생겨났다는 주장도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민족 국가는 확실히 근대에 성립되었고, 그 민족 국가를 구성하는 개념으로서의 민족도 근대에 성립된 것은 맞다. 하지만 광의의 민족은 그전부터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중앙집권적인 통일국가를 형성하면서 민족 개념이 생겼을 가능성이 높다. 앙드레 슈미드는 그의 저서 <제국 그 사이의 한국 1895-1919>에서 18세기 초 청과 조선의 영토 분쟁을 예로 들면서 비록 근대적 형태는 아닐지라도 국경이나 민족에 대한 개념이 한반도에 존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는 모든 전근대 사회가 마치 똑같았던 것처럼 오해하면 안 되며, 모든 '민족(nation)' 개념이 모든 사회에서 똑같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우리는 민족이 근대에 이르러서야 탄생했다는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한반도의 역사적 특수성을 고려해 재고해봐야할 것이다.

제국 그 사이의 한국 1895-1919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앙드레 슈미드 (휴머니스트,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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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또는 서구의 민족주의 담론을 그대로 받아들여 우리나라의 민족주의를 비판만 하는 것은 또다른 문명근대화론일 수 있다. 민족주의를 비판만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민족을 강조하는 것은 '촌스러운 것', '후진국스러운 것'이라는 의식이 깔려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민족의 긍정적 측면이나 한국적 특수성, 또는 최근의 비동원적인 민족주의, 즉 대중주의로의 변화를 읽지 못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들은 지나치게 서구의 눈, 또는 수십 년 전의 눈으로 민족주의를 읽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민족 개념을 깡그리 없애야 한다는 파괴적인 비판보다는 건설적인 비판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순혈주의 비판은 매우 필요하다. 한국은 여전히 외국인혐오증이 심한 사회고, 다문화가정에 대한 배려도 부족하다. 결혼이주여성과 혼혈자녀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혈통적 다양성을 강조하는 새로운 민족 개념이 필요하다. 그리고 민족 개념이 국가에 의해 악용될 가능성이 상존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에 대한 경계는 늦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통일의 중요한 명분, 국가에 저항하는 명분으로서의 민족이라는 한국적 특수성, 타국가에 비해 매우 동질적인 집단 등을 고려할 때 민족은 폐기해야 할 것도 폐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만고불변의 혈연집단으로서의 민족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이 땅에 살고 있는 역동적인 공동체로서의 민족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그 실체와 유용성을 존중하며 이왕이면 그 힘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하길 바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올림픽 기사들을 살펴본다. 이제는 예전과 달리 국가니 민족이니 국민들이니 하는 말 없이 개인적 성취에 자연스럽게 기뻐하는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을 보며 국가 동원의 민족주의 색채가 젊은이들의 의식 속에서 많이 사라졌다는 걸 느끼며 흐뭇해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들이 나와 같은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개인적 성취에 대해 나라는 개인도 기쁨을 느낀다. 그로 인해 내가 기뻐할 수 있다면, 또 사람들이 기뻐할 수 있다면 좋지 않은가?

스포츠 민족주의 운운하며 젠체하느니 차라리 소리높여 한국팀과 선수들을 응원하고 축하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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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를 확신하는 김연아의 모습 - 그냥 마지막 사진으로 쓰고 싶어서... ^^;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3. 1.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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