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학문 분야에 있는 사람이 가장 실증주의적일까 묻는다면 대개는 자연과학도나 공학도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인문학은 실증주의와는 거리가 좀 있으니까. 하지만 가장 실증주의적인 부류는 자연과학의 방법으로 인문학의 대상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한다. 바로 심리학자들, 인지과학자들 말이다. 이공계 사람들은 낭만적인 데가 있어서 모든 것에 철저히 실증주의적이지가 않다. 천문학자들이나 물리학자들이 낭만적으로 그려지는 건 익숙하고, 공학도들은 기계에 대해서만 냉철할 뿐 인간과 관련해선 그리 철저해 보이지 않는다. 반면 인간에 대해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심리학자(주로 인지 분야)와 인지과학자들이야말로 인간을 가장 냉철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아닌가 싶다.

인지심리학 랩에 있을 때 나는 동료들과 종종 근원적인 논쟁을 벌이곤 했다. 그중 가장 치열했던 것은 뇌를 연구함으로써 인간 정신의 비밀을 풀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현재 학계의 주류적 입장은 그렇다는 것이다. 인지심리학이 심리학의 주류를 점하고, 다시 신경과학이 인지심리학의 주류를 점해, 인지신경과학이 마음에 대한 학문의 최정점에 서있는 지금, 대부분의 학자는 뇌에 관한 연구가 인간 정신의 비밀을 풀어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나는 이것이 지나친 환원주의라고 생각했다. 물리학에서조차 미시 세계와 거시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은 다르다. 화학에서 수소와 산소의 성질을 안다고 해서 물의 성질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뇌의 신경구조를 이해한다고 해서 인간 정신의 법칙들을 모두 설명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나의 논점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물질과 정신이 별개라는 이원론자인 것은 아니다. 나는 일원론자이고, 당연히 뇌가 없이는 정신도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뇌에 관한 설명이 곧 정신에 관한 설명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나의 생각은 랩 친구들과의 논쟁에서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들은 일원론을 받아들인다면 당연히 환원주의를 취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여기서 일원론은 당연히 유물론이기에 우리의 정신의 기반이 되는 뇌에 관한 연구가 곧 정신에 관한 연구라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이 하도 강견하고 나는 혼자였기 때문에 비록 내 생각을 꺾진 않았지만 내 생각에 대한 자신감이 꺾이긴 했다. 또 학계에서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학자는 없는 것 같아서 환원주의에 대한 내 우려는 기우인 걸까, 심지어 내가 인문학을 한 사람이라 환원주의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의심도 들었다.

그런데 최근에, 난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학계에도 존재한다는 걸 알았다. <뇌과학의 함정>(원제: Out of Our Heads)이란 책을 발견하고 말이다. 저자는 UC 버클리의 철학과 조교수이며 철학자이지 인지과학자이자 신경과학자인 알바 노에(Alva Noё)이다. 나는 내 생각이 진지하게 학계에서 논의되는 주제라는 걸 알고서 무척 기뻤다. 그래, 편견을 가진 건 내가 아니라 그들이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뇌 과학의 함정: 인간에 관한 가장 위험한 착각에 대하여
카테고리 과학
지은이 알바 노에 (갤리온, 2009년)
상세보기

최근 뇌과학의 열풍 속에서 많은 책들이 출간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이 책은 매우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 뇌과학을 비판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요즘, 아니 예전부터 뇌과학의 가장 큰 목표는 '의식의 신경 상관물(Neural Correlates of Consciousness)'을 찾는 것이다. 즉 뇌의 어떤 부분이 의식을 일으키는가 하는 것이다. 낸시 캔위셔(Nancy Kanwisher)가 얼굴을 지각하는 특정 영역(FFA:face fusiform area)을 발견한 이후 뇌는 특정한 기능을 담당하는 여러 모듈들의 집합체로 여겨지고 있다. 아니, 그 역사는 허블과 비셀이 고양이 뇌를 이용해 특정한 선분을 감지하는 시각세포를 발견한 데까지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신경과학자들은 의식을 일으키는 특정 영역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비록 그 영역이 시각 세포처럼 특정한 세포이거나 FFA처럼 특정한 부위가 아니라, 여러 부위들의 연합체일지라도, 어쨌든 의식이 뇌 안에 특정한 영역에 의해 발생한다는 가정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이 책은 그 가정을 비판하는 데서 출발한다.

저자는 의식이란 우리 뇌와 몸과 세상과의 역동적인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뇌만 연구해서는 의식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가장 많이 연구돼온 시각을 예로 들어보자. 주류 신경과학자들은 시각에 대해서 뇌가 일종의 퍼즐을 맞추는 것이라고 본다. 즉 외부로부터 입력된 상당히 제한된 정보를 뇌가 그럴듯한 정보로 처리하고 구성한 후 의식이 보게 되는 것이 시각이라는 것이다. 즉 '본다'는 것은 뇌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각을 연구하려면 우리 머릿속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저자는 뇌가 그렇게 복잡하게 보는 것을 구성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부족한 정보는 몸과 세상의 도움을 받아 충분히 메꿀 수 있다. 우리는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움직여서 사물의 다른 곳을 볼 수 있다.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세상은 자신의 다른 모습을 끊임 없이 일관적으로 보여준다. 우리가 '보는 것'은 뇌가 구성한 영상이 아니라 '세상'이고, 시각은 우리의 뇌와 몸과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다양한 사례를 들어 시각 및 여러 인지 기능을 뇌 속으로 집어넣으려는 주류적 입장들을 비판한다. '부주의맹'같은 것은 입력 정보의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현상으로 여겨져 왔지만, 저자는 세상이 거기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 뇌가 굳이 모든 정보를 기억하고 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대학원 시절 배웠던 익숙한 현상들이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웠다. 그리고 한 번은 내가 교수님과 논쟁을 했던 사항-꿈과 현실을 다른가-도 논의가 된다. 나나 저자의 주장은 물론 꿈과 현실은 다르다는 것이다.

저자는 궁극적으로 공격하려는 것은 주류 신경과학에 깔려있는 '통 속의 뇌' 은유이다. 즉 우리의 정신 현상은 모두 뇌 속에서 일어나며, 뇌만으로도 정신을 일으키는 데 충분하므로, 적절한 양분을 공급해 살아있게만 해준다면 '통 속의 뇌'만으로도 우리 정신은 유지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것에 대해 단호히 비판한다. 정신 현상은 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뇌와 몸과 세상의 상호작용으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런 가정의 뿌리는 데카르트까지 올라간다고 본다. 일찍이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 과정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악마가 만들어낸 가짜일지도 모른다고 가정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하고 생각하는 우리 자신은 존재한다. 물질에 대해 정신의 우위를 주장한 이원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저자는 현대의 과학자들이 모두 일원론자임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의 정신을 뇌로 치환한 이원론자나 다름없는 가정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과학자들의 철학에 대한 무시와 무지도 비판하고 있는데 이는 옳은 비판인 것 같다. 많은 과학자들이 철학을 철지난, 발전이 없는 학문으로 무시하고 있다. 나의 랩동료들도 철학도 과학이며, 과학의 일부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과학은 실증주의라는 정해진 방법론을 따르지만, 철학은 자신의 방법론 자체에 대해 회의하는 학문이므로 차원이 다르다고 반박했다. 이에 대한 그들의 반박은 실증적이지 않은 학문은 학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실증주의에 대한 맹신이 이 정도다. 저자는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학문의 기반이 되는 가정들이 얼마나 오래 전에 철학에 논의되어 온 명제들인지 모르고 있다고 비판한다. '통 속의 뇌'가 대표적이다. 그들은 이원론을 벗어났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정신이 뇌로 이름만 바뀐 이원론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더 하고 싶은 얘기들이 많지만 이 이상 나아가면 너무 전문적인 얘기들이 될 것 같다. 하지만 인지과학 석사 수준에서는 알아듣기에는 딱 적당한, 정말 흥미로운 얘기들이 많이 나오면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토론 거리를 던져주는 유익한 책이었다. 시각 과학의 거장들인 헬름홀츠, 마, 깁슨부터, 신경과학자 캔위셔, 언어심리학자 핑커, DNA 발견으로 노벨상을 탄 후 신경과학으로 분야를 옮긴 크릭, 철학자 설, 언어학자 촘스키 등등. 이런 거장들을 비판하는(생태학적 관점을 제기한 깁슨 제외) 데서 오는 대리만족도 있었을 것이다.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데서 오는 쾌감은 더 컸고.

이 분야(인지과학, 신경과학, 뇌과학, 인식론)에 관심 있는 여러분의 일독을 권한다. 다만 이 책이 주류적 입장은 아니므로, 익숙하지 않은 분이라면 주류 입장에 가까운 책을 먼저 읽어보길 권한다. 핑커의 책들과 국내 학자들이 쓴 뇌과학에 대한 책을 추천한다.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스티븐 핑커 (소소, 2007년)
상세보기

빈 서판:인간은 본성을 타고 나는가(사이언스 클래식 2)
카테고리 과학
지은이 스티븐 핑커 (사이언스북스, 2004년)
상세보기

마음을 움직이는 뇌 뇌를 움직이는 마음
카테고리 과학
지은이 성영신 외 (해나무, 2004년)
상세보기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2. 9. 01:19
쓴다쓴다 하면서도 게으름 때문에 글을 못 쓰고 있었다.

1.
안의 <실종일기> 감상문을 읽고 나도 <사채꾼 우시지마>의 감상문을 쓰고 싶었다. 인생의 밑바닥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만화랄까? <실종일기>와는 달리 내용도 그림체도 명랑하지 않다. 옴니버스 형식이라 매 권 중심인물이 바뀌는데 가끔은 감정이입도 쉽지 않다. 스스로 인생을 망치고 있는 인물들도 꽤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나약함조차도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그들은 나와 전혀 다른 인간이라고 쉽사리 부정할 수만은 없다. 사악하면서도 나약하고 비겁한 인물들의 개인적 과오와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고 그 욕망을 이용해 인간성을 파괴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부조리가 만들어내는 지옥, 그것이 이 만화가 그리는 세상이다. 그 지옥 끝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자는 먼저 절망부터 경험해야 한다.



2.
요즘 기독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있다. 계기는 김대중의 <옥중서신>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신념과 독재 정권에 맞선 투쟁으로 상당 부분 채워져있을 거란 예상과는 달리 그의 서신의 반 이상은 신앙에 관한 것이었다. 핍박을 겪으면서도 그는 끊임없이 신앙을 고백하고 예수님께 의지하면서 뜻을 잃지 않았다. 사실 반독재 투쟁도 예수의 이웃 사랑을 실천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고난으로 단련된 신앙이기에 비신자인 내가 보기에도 그의 신앙은 진실되고 믿을 수 있었다. 게다가 그는 종교적으로 배타적이지 않았다. 그가 편지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의 결혼 자체가 상당히 에큐메니컬한 것이었다. (DJ는 천주교도, 이희호 여사는 개신교도이다.) 그는 여러 교파를 초월해 함께 투쟁해나가기 위해 노력했으며, 현대의 과학을 인정했으며, 비신자들을 배척하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이명박 같은 이의 기독교는 얼마나 천박한가. 그와 그를 따르는 이들은 예수가 아니라 물신을 섬기는 것이며, 그들이 스스로를 도덕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바리새인의 도덕에 불과할 것이다. 아무튼 이명박이 떨어뜨려놓은 나의 기독교에 대한 인상을 김대중이 다시 올려놓고 있다.

옥중서신. 1: 김대중이 이희호에게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김대중 (시대의창, 2009년)
상세보기

하지만 사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는 게 아니고, 그것이 이 책의 교훈도 아니다. 내가 정말 진지하게 생각하는 건 그러한 고통과 역경 속에서도 의지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그의 신앙 때문이었나 하는 점이다. 나는 종교인은 아니지만 인간의 이성을 과신하지 않으며 나란 사람이 얼마나 나약한가를 매일 느끼고 있다. 자신의 이성과 의지만을 믿고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며,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에 누군가에 의지한다. 그러나 우리가 의지하는 것들조차 불완전하기 그지없다. 그렇다면 절대자에 의지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신앙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것인가? (마치 우리 학교 교훈처럼 말이다.) 내 안의 어둠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된다.


3.
<자유의지, 그 환상의 진화>란 책을 읽고 있다. 아직 반밖에 못 읽었지만 내 생각과 완전히 일치하는 구절을 발견했다.

자유의지 그 환상의 진화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프란츠 M. 부케티츠 (열음사, 2009년)
상세보기

오늘날 신경 생물학 및 진화에 대한 연구, 생태학과 그 밖의 다른 (생물학) 분야에서 알려준 바에 따르면, 이른바 모든 정신 상태는 신경 프로세스들에 의존해 있다. 그리고 그 프로세스들은 오랜 진화의 역사를 통해 선택되고 안정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신경 상태와 정신 상태를 '동일시하는' 것의 정당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미 오래전에, 뇌(혹은 다른 기관)에서 정신(영혼 혹은 의지)의 "본거지"를 찾는 작업은 시대에 뒤떨어진 일이라는 게 판명 났다. (인간) 뇌의 섬세한 구조에 대한 그토록 상세한 지식조차도 우리가 그곳에서 생각이나 결정이나 욕망이나 기대나 기쁨이나 근심을 인식하게 해주지 못한다. 이것들은 뇌에 "거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뇌의 특수한 특성이다. 정신 현상이란 뇌 '시스템의 특성'이라는 것이 요점인데, 이는 특정한 기관들(주족, 날개, 지느러미)의 특성이 운동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 누구도 이런 기관들에서 운동 자체를 찾아내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비유적인 의미로만 뇌가 의식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여기서 뇌와 정신의 단일성을 이야기할 때 그것이 "서로 환원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125~126쪽)

내가 인지심리학 대학원에서 동료들과 가장 많이 다투었던 철학적 문제가 바로 저것이었다. 인지심리학도들이었으므로 우리는 당연히 일원론자였다. (왜 당연한지는, 이쪽 분야 분위기를 보면 안다. 심리학의 여러 분야 중에서 가장 '하드 사이언스'를 추구한다.) 그러나 나는 일원론자이면서 환원주의자가 아니었다. 나는 당연히 인간 정신은 뇌에서 발현된다는 걸 '알지만' 뇌 연구를 통해 인간 정신의 모든 비밀을 밝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뇌에 대한 물리적, 생리화학적 연구는 인간 정신의 비밀 중 일부분만을 밝혀줄 것이다. 뇌의 구조가 아닌 상태를 찍는 fMRI를 이용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나는 어떠한 현상의 물리적 기반의 원리와 그 현상의 원리가 같다고 할 수는 없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세계는 물질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일원론자이면서 물리 현상과 정신 현상의 원리는 다를 수 있다는 이중론자이다. 이 책의 저자의 생각이 내 생각과 완전히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저 구절은 내 생각과 상당히 비슷하다고 느꼈다. 진화론에 대한 강한 긍정과 환원론에 대한 부정이 함께 담겨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
셋 다 좀 길게 쓰고 싶었는데 그냥 짧게 써서 올린다. 글 쓰는 데 너무 부담 갖다 보니 오히려 못 쓰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냥 생각나는 대로 써보았다. 다음엔 아마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를 읽은 것에 대해 쓰지 않을까 싶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 14:17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