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 랜도

생각 7.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2. 12. 15:34

1.
종로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사온 소설 몇 권을 읽다가 집어 던져버렸다. 소설이 수준 이하였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문제의 중심은 나였다. 한가하게 책을 읽을 여유를 토익 때문에 저당잡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대단히 창피한 일이지만, 이놈의 토익 공부라는 것이 범상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부수적인 토익이라는 놈 때문에 내 인생의 소중한 가치마저 모조리 유예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언짢았다. 거지같은 현실은 참 싫다.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이 더욱 더.

2.
악감정도 선감정도 없는 기존 회사를 탈출해 새 직장으로 이동한다. 나란 인간은 지독하게 한심한 인간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매 2년마다 철새처럼 이리저리 둥지를 이동하는 족속은 아니다. 물론 물리적 나이가 20대였을 때는 그것이 혈기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이동이었지만, 지금, 마음만 20대인 상황에서는 내가 책임질 수 없는 일은 하지 않는다. 나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얼뜨기 같은 존재라 서류전형이나 면접전형에서는 나를 매우 잘나가는 인간으로 궤적을 돌려놓아야 한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못나가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런 포장을 숙련된 약장수들이 모를 리 없지만, 그 포장지는 속임수가 아니라 나를 평가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 생각한다. 이젠, 정말, 아무 것도 없이 다 지쳤다. 어쨌든 다 늙어빠진 나를 신입사원이라는 명목으로 들여넣어준 그 조직에는 좌변과 우변이 다 소거되고 감사함이라는 항만 남았다.

3.
눈물이 많아진다.
브라운아이드소울을 들어도, 옛날 90년대 청춘드라마 '느낌,' '프로포즈,' '광끼,' '내일은 사랑'을 보아도, 싸늘한 거리를 내려와 시장 안에 이백 원 저렴한 코크제로를 사들고 올라와도, 너에게 인류애를 담고 있는 문자를 보내도. 정작 나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는 실용적이고도 합리적인데, 그 실용성과 합리성 사이의 공동에는 차디찬 외로움과 우울함만이 가득 차버린다. 내 인생이 반직선 위의 점의 자취라 가정할 때, 효율성의 자취를 지날 때는 모르고 있다가 차디찬 곳을 지날 때는 몸 전체에 동상이 걸려버려 꼼짝할 수 없다. 눈물은 셀 수 없이 쏟아지고, 사랑과 미움, 슬픔과 기쁨, 몽상과 현실을 맴돌던 자아가 악령처럼 한꺼번에 내 가슴속에 걸려 나오지 않는다. 마치 심령치료가 필요한 사람처럼 어질어질한 느낌에 쓰러져 있다가 잠이 드는 적이 여러 번이다. 물론 나 자신, 사막 같은 세상에서 고무 냄새나는 튼튼한 줄을 붙들어야 겨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보는 아니다. 고무 냄새나는 손은 외부 저항에 경도되어 퉁퉁 붓기 일쑤지만. 대학 때부터 집안 생계를 책임진다는 것이 면류관은 아니다, 자랑은 더더욱 아니다. 대부분의 순간 피곤하다는 이유로 나는 나의 고통을 참거나 잊기도 하지만, 요새, 더욱 자주 거울 속에 쥐도 새도 모르게 후두둑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 남자를 더 자주 보는 것은 쓸쓸한 일이다.

4.
97년 '프로포즈'를 보다가 '윤주'라는 캐릭터(조은숙)에 흠뻑 빠져 헤어나오지 못한 적이 있었다. 윤주는 자신의 대학친구 '수빈'(류시원)을 외사랑하는 인물로, 나는 배우 조은숙의 외모 전성기 시절 그 큰 눈에 빠져있었다. 그런 외양과 윤주라는 캐릭터가 연합되어 오후 10시에 야자(야간자율학습)가 끝나자마자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와 가족이 싫어함에도 불구, 끝나가는 KBS2 그 프로에 시선을 고정시켰던 기억이 난다. 나는 이 드라마를 본 이후 '윤주'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에 대해 근거 없는 호감이 생기기도 했고, 팔색조와 같은 연기를 자랑하는 아이 셋 딸린 조은숙에게 밑도 끝도 없이 당시의 순애보 연기를 갈구하기도 했다.
윤주는 '유라'(김희선)에게만 온 정신을 투자하는 수빈에게 자신의 전존재를 내던지는 사랑을 투여한다. 하지만 이런 극단적인 사랑은 드라마에서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이 보통. 자신과 수빈 사이 유라라는 극복할 수 없는 벽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윤주는 프랑스로 유학을 가버린다.
(대략적인 내용은 동네소꿉친구인 유라와 수빈이 친구라는 감정 속에 사랑이라는 세포가 함께 자라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프로포즈' 관련 타 블로그나 게시물 등을 참고하시면 명확하게 파악하실 수 있을 겁니다, 만약에 관심이 있으시다면요. 친절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내가 뜬금없이 '케케묵은' 드라마 '프로포즈' 얘기를 한 것은 빨려들어가고 싶은 눈을 가진 조은숙의 '전성기 외모' 탓도 있지만, 윤주의 맹목적이고 헌신적인 사랑 때문이었다. 그녀는 '네가 말하는 사랑이 대체 뭐냐'며 힐난하는 수빈에게 '그 사람이 되는 것'이라 말했다.(이후 대사도 많았지만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당시 내가 사랑에 대해 갖고 있는 어렴풋한 생각을 그 대사로 인해 구체화할 수 있었다. 굳이 에로스와 아가페라는 용어로 돌아가지 않고라도, 내가 그 사람이 되어 이러저러한 일을 같이 감당해낼 수 있다면 상대방은 얼마나 행복할까. 이런 생각만으로 내 학창시절은 가득찼다.

..물론 지금은 여자 구경도 못해봤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