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즉흥 3.
꿈, 세부 사항은 기억나지 않는. 감색 배경. 난 어딘가에서 다른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었고, 그것은 끝도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형체를 알 수 없는 괴물 같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괴물이 아닐 수도 있다, 도무지 인물의 경계가 잡히지 않았다)가 날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달리기에 서투른 나는 계속 그 존재에게 붙잡힐 것 같았고 그 존재는 삽시간에 내 바로 뒤까지 다가섰다. 더 이상 달리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해, 나는 군대에서 배웠던 적의 핵 공격에 보호하는 자세로 땅에 바싹 엎드렸다. 마치 땅과 내가 하나였던 것처럼. 그 존재는 그 순간 나를 감싸고 돌아 날 가소롭다는 듯 째려보았다. 그런데, 째려본다는 느낌은 왜 든 것일까. 얼굴도 없고 눈도 없는 존재에게 존재 이상의 강압을 느낀다는 것도 기이한 체험이었다. 마침내 검은 배경이 나를 덮칠 때 나는 소스라치며 깨어났다.
악몽은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나쁜 꿈과 나쁜 현실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니까. 악몽이든 길몽이든 이렇게 단시간 내에 눈을 떠본 기억은 별로 없었다. 나는 그 점에 강하게 도취되었다.
출근길 4호선. 수유역은 강북 교통의 요지였지만, 그것은 매일 그 역을 이용해야 하는 평범한 회사원에게는 지루하고 힘겨운 강의시간과 다름없었다. 시간은 가지 않고 주변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 답답한 강의시간. 나와 같은 칸을 탄 사람 모두 제각기 다른 수트를 입고 있었다. 검은색, 은색, 갈색, 감색…. 감색 수트를 본 순간 나는 오늘 아침에 꾸었던 꿈이 겹쳐져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이 사람들처럼 불과 며칠 전까지는 회사에 나가 일을 ‘했었다.’ 지하철에 있는 선남선녀들은 제각기 일터로 가겠지. 하지만 나는 이제 그렇지 않다. 나도 그들인 것처럼 검은색 수트로 옷차림을 가장하고 있지만. 사실 난 회사가 밀집한 을지로로 가는 것은 그들과 다를 바 없었지만, 난 실업급여를 신청하러 고용보험센터로 가는 길이었다.
사실 난 처음에 실업급여를 받고자 하는 생각은 없었다. 고용보험을 꼬박꼬박 타의로 납부하긴 했지만, 그것이 내 인생의 돈줄을 연장시켜 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단지 조금 더 나은 조건으로 이직하기 위해 원서를 냈던 곳 중 기업명이 휘황찬란해서 마음에 들었던 곳에서 ‘최종합격이긴 하지만,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될 때까지 2개월을 기다려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던 것이다. 물론 2개월간 원래 직장을 다닐 수도 있었다. 범인(凡人)의 눈으로 보면 그것이 당연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나는 노후가 보장되어 웃고 있는 생명보험 광고의 그 할아버지처럼 보장된 미래에 대해 의심하고 싶지 않았고, 주어질 수 있는 자유를 방기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 기간 동안 술을 마시고 싶었고, 여행을 다니고 싶었으며, 하루 종일 집안에서 ‘집귀신’과 함께 대화하고 싶었다. 궐기하다시피 해서 얻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선 놀러갈 돈이 있어야 했다. 그것이 나를 고용보험센터로 이끌었다.
출근 시간이 채 되지도 않은 시각인데, 고용보험센터 안은 경마장 매표소만큼이나 북적였다. 좁은 대한민국 땅덩어리에 무엇인가 떡고물을 기대한 사람이 왜 이리 많은 건지. 모두들 하늘에서 금가루가 떨어진다는 예보를 듣고 서서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사람들 같았다. 물론 나도 그 옆에서 입을 벌리고 있었다. 나처럼 30대 초반도 있지만 20대 중반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너도나도 뽑은 번호표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눈은 조금 과장한다면 병원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최종 선고를 들은 사람들처럼 흐릿했다.
딩동.
내 차례를 알리는 번호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아주 많아 오래 기다릴 것 같았는데, 다행히 내 차례가 되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앉자마자 인상이 무서워 보이는 직원의 무미한 손길로 내가 가져온 서류를 들여다보고는 다 됐습니다, 라고 말했다.
남은 절차가 있나요.
안내사항 관련 교육이 있으니까, 그거 듣고 가셔야 합니다. 다음에 오실 때 구직하고 있다는 증명서류를 가져오셔야 해요.
교육이 있다는 방은 큰 회의실이었다. 방금까지 나와 같이 초점 없는 눈빛으로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방으로 이동했다. 나는 이들의 방향 없어 보이는 모습이 마치 주말드라마의 행인 1, 행인 2, 행인 3 등으로 느껴졌다. 이 사람들도 자식이 있고, 부모님이 있고 때로 친구들과 소주잔을 기울일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 오면 그저 몰개성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나는 예비군 훈련이 갑작스레 떠오르고는 빙긋이 웃었다. 비슷한 눈빛을 그 곳에서도 보았기 때문이다. 고용보험공단 출석과 예비군훈련 출석은 재취업 지원금 지급과 국가 안보 확립이라는 거창한 목적이 있지만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다분히 의무적이라는 사실만 남아있다. 노력 없는 댓가는 없다. 서류를 빠짐없이 지참하고 교육에 빠짐없이 출석해야 지원금이 나오는 것이다. 나는 고용보험 부정수급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 영상물을 보는 둥 마는 둥하며 새로 산 스마트폰의 이런 저런 기능을 실험하고 있었다. 우리들의 지루함을 모르는 교육은 그제야 끝났다.
나는 종례시간이 끝난 철없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이리저리 움직였다. 을지로에서 청계로, 그리고 종로로. 자유. 멀쩡한 회사를 내 멋대로 그만 두고 스스로 낚아챈 것에 그런 고귀한 언어를 동일시하는 것은 너무 치기 어린 짓이다. 그런 것도 자유가 된다면, 길거리에서 감자 프라이가 덕지덕지 붙은 핫도그에 샛노란 머스터드소스를 칙 뿌려먹는 것도 자유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난 기쁨에 비해 주어진 오랜만의 외출을 효율적으로 즐기지 못하고 있었다.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친구들은 모두 회사에 다니거나 직업이 있었고, 내가 좋아하는 오락실도 자취를 감추었다. 물론 나도 2개월 후면 그들처럼 다시 어엿한 직장으로 돌아갈 테지만. 나는 길을 걸으며 스마트폰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화면 구성을 보았고, 벨소리를 들었고, 구동할 수 있는 모든 어플리케이션을 해 보았다. 나는 조선시대 뒷짐 지고 걸어가는 양반이 된 양 에헴, 하며 헛기침을 날렸다. 이 순간 내 위에는 따뜻한 햇살이 있었고, 모든 것은 충족된 것 같았다.
그리고 바로 내 스마트폰에서 들었던 벨소리와 똑같은 벨소리를 들었다. 며칠이 지난 후 춘천 가는 전철 안에서. 나는 며칠 전에 어디선가 들었던 벨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전날 많이 자서 피곤하지도 않은데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졸기 전에 평내호평 역을 비몽사몽 간에 본 기억이 어렴풋이 들었고, 지금 슬쩍 눈을 떠보니 굴봉산 역이었다. 나는 눈을 들어 위에 있는 지하철역 안내도를 바라보다 뭇 사람들의 시선이 줄곧 나를 향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뿔싸, 그 벨소리는 바로 내 것이었지. 나는 멋쩍은 웃음과 함께 통화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산업입니다. 조창민 씨 되시죠?”
2개월이 지나면 입사할 회사였다. 나는 들뜬 마음에 화답했다.
“네, 안녕하세요. 맞습니다.”
“인사과장입니다.”
“아, 예.”
입사를 더 빨리 하라는 건가. 아니면 사장님이 한 번 오라고 한 건가. 많은 생각이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조창민 씨가 입사하려고 했던 직종이 회사 사정에 의해서 없어지게 되었어요. 그래서 신규 인력이 필요없게 되었죠. 기존 팀원도 부서를 옮기거나 명예퇴직을 권유하고 있어요. 안타까운 소식이지만 하루라도 빨리 창민 씨에게 알려드려야 할 거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혹시 전 직장에 사직서는 제출하셨나요? 제출하시면 안 될 거 같아서요.”
나는 나를 구성하는 공기의 흐름이 이상해짐을 눈치채지 못한 채, 거세진 공기의 역풍을 정통으로 얻어맞아 크게 기우뚱했다. 그리고는 정신이 혼미해져서 마음에 없는 이야기를 하고야 말았다.
“네, 회사에는 잘 다니고 있습니다. 사직서를 냈으면 큰일날 뻔 했네요.”
“저희 회사가 많이 어려워져서 창민 씨를 다른 부서에라도 입사시키려고 제 개인적으로는 많이 노력했지만, 워낙 윗분들 태도가 강경하셔서요.”
나는 인사과장이라는 작자의 넋두리가 듣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또 한 번 내 의지와 관계없이 말했다.
“예, 알겠습니다. 빨리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모쪼록 건승하시고요, 좋은 하루 되십시오.”
딸깍.
내 숨이 전화를 끊는 소리와 함께 끊어졌으면, 하고 나는 바랐다. 그러나 당연하다는 듯 나는 빌어먹을 숨을 내쉬고 있었다. 불과 며칠 동안 느꼈던 한정된 자유는 영원한 자유로 바뀌었고 불처럼 타오르던 마음은 까맣게 재가 되어버렸다. 핸드폰 거울 안에는 한동안 넋이 나간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는 내가 있었다.
남춘천역.
충격을 받은 후 무작정 전철에서 내려 벤치에 앉았다. 여자친구가 없다 뿐이지 내 삶은 평탄하기 그지 없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명문대 경영학과. 군대, 휴학 후 인턴, 졸업 후 취업. 물론 그 과정 속에서 댓가를 누리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어려움은 늘 존재했지만 이런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흐름이 갑자기 단절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난 매번 무엇인가 할 게 있었고, 기쁨이나 슬픔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것도 할 게 없었고, 아무런 감정도 내 안에 없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상실.
나는 아무 힘이 없이 그대로 벤치에서 쪽잠이 들었다.
꿈은 곧 나를 찾아왔다. 나는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본 감색 벽지가 깔린 카페였다. 꿈속의 나는 충격때문인지 더 야위어 있었다. 이상한 것은 분명 잠을 잔 이후의 형상이므로 꿈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이 영상이 현실 같다는 것이다. 게다가 난 혼자 커피를 마시는 것이 아니었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검은 개체가 내 앞에,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는 것이었다! 자신의 색깔과 같은 에스프레소를, 들었다 놨다 하면서. 나는 그 광경이 한 폭의 명화 같다는 착각까지 하고 있었다. 내가 들고 있었던 것은 평소에 내가 좋아했던 옅은 아메리카노인데, 검은 빛이 나는 아메리카노가 에스프레소에 비해 초라해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우우웅어워어엇.
검은 개체로부터 난 소리였다. 형상을 알아볼 수 없는 개체에게 입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개체는 뭐라 알 수 없는 말을 해댔다.
네?
우우워어워어엇.
나는 연거푸 듣는다고 못 알아들었던 검은 개체의 말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말, 아니 음향이나 소음이 익숙한 질감으로 들렸다. ‘스펀지’ 같은 텔레비전 프로에서 음향을 아주 천천히 돌리면 이런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한 번만 더 말해주세요.
우우워어워워어엇.
다시 말하지만, 검은 개체의 입은 도저히 찾을 수도 없었기 때문에 복화술 자체가 아예 불가능했다. 이것은 전적으로 내 감에 의존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감탄사와 유사한 이 말을 해석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어차피 수백 번 들어봐도 모르는 말일 바에는 그냥 내 기분대로,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 꿈에서 계속 무섭게 절 쫓아왔잖아요, 빚쟁이처럼. 그렇게 어두운 무언가가 무섭게 저를 쫓는데 안 도망칠 사람이 어디있겠어요. 대놓고 죽겠다는 사람이 아니라면.
전적으로 감에 의존하여,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는 생각으로 ‘넌 왜 나를 쫓아왔니’, 라는 물음에 대한 내 술회를 담았다.
크우우우어아아아앗.
이 말은 아마,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우리가 생태계를 구성하는 개체도 아니고 내가 널 왜 잡아먹겠어, 라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드라마나 만화, 소설, 기타 많은 이야기에서도 그런 모양새를 한 사람은 악당이라고요, 악당. 제 말 무슨 소린지 아시겠어요. 왜 제가 그런 악당에게 갑자기 잡혔는지 모르겠다고요. 더구나 여긴 감옥이나 지옥도 아니고 그냥 스타벅스 같은 커피숍이잖아요. 왜 제가 좋아하는 아메리카노를 당신과 같이 마시는지 모르겠어요. 죽기 전에 마지막 휴식인 건가요. 사형 전에 주는 사식처럼, 그런 건가요.
커피는 그냥 내 마음의 표시야. 그리고 널 전혀 해치지 않아. 난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나는 이 세계에도, 저 세계에도 규정되지 않은 개체이기 때문에 형체가 없는 거야. 그냥 이런 형태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거야.
내가 엉뚱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은 궁여지책이었지만, 갑자기 외침에 불과했던 음성이 한국어로 변환되어 똑똑히 들리는 것은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내가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는 금방 한 꺼풀 벗겨낼 수 있는 겉 같은 침착함을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
당신의 정체에는 관심이 없고요, 왜 내 꿈에 온 거에요? 안 그래도 제 현실세계는 괴로운 일투성이에요. 결혼은 포기한지 오래됐고 직장은 있었지만, 없어졌어요. 지방에 사시는 부모님 생활비는 누가 해결하죠? 밀릴 방세는요? 전 숙면을 취할 수가 없지만 인위적으로라도 잠을 자야만 해요. 그런데 이런 생생한, 생경한 풍경이 절 자꾸 괴롭혀요. 그냥 가줬으면 좋겠어요, 되도록, 빨리. 눈앞에서 사라져주세요.
그렇게 감정적이고 감성적으로 말하지 말아줘. 나는 너에게 어떠한 종류의 도움이 되고 싶었던 거야. 너 콜라 좋아하잖아. 식어빠진 콜라가 되기는 싫다고.
도움요? 지금 저의 소중한 30분을 빼앗아간 것 아세요? 지금도 시간은 흘러가고 있고 흐른 시간과 차오르는 부아는 정비례하고 있는데 당신이 제 현실세계의 모든 것을 바꿔줄 수라도 있는 건가요.
내가 열변을 토한 것은 여기까지였다. 그 순간 커피가 놓인 테이블에 양피로 만든 종이 한 장이 놓여졌다. 검은 개체가 그 종이를 놓게 한 것은 맞으나, 그에게는 그 종이를 넣었던 가방도 없고 더구나 그는 종이를 휴대하고 다니지도 않았다. 마술사 데이비드 카퍼필드가 선생으로 삼고 싶다고 할 실력이었다. 아니, 이는 마술의 경지가 아니라 동화책에서만 보던 마법인 지도 모르겠다.
계약서야.
검은 개체는 평온한 어투로 말했다. 하지만 나는 격앙되어 있었다. 이런 방식대로라면 나는 검은 개체에게 그대로 KO당하고 말 것이다. 사랑도 더 사랑하는 사람이 덜 사랑하는 사람에게 질질 끌리다가 비극적인 이별을 맞는 것 아니던가. 나는 그 검은 개체가 인간의 부류였다면 잘 나가는 판매영업사원이 되었을 거라 망상했다. 치열하고도 비열한 판매왕 영업사원.
나는 검은 개체가 계약서라고 한 양피지를 보았으나 글씨라고 되어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백지 계약서라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하지만 여기는 이 세상이 아닌 것 같다. 적어도 지금 꿈 속 공간에서는 말이다.
여기, 아무 것도 안 쓰여 있는데요.
검은 개체는 그래? 잠깐만, 이라 한 후 양피지를 자신의 검은 배경에 스윽 문지르고는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양피지는 거짓말처럼 겹겹촘촘한 글자로 채워져 있었다. 마치 검은 배경이 잉크나 토너인 것 같았다. 문지르면 검은 글씨가 나타나다니.
어이, 거기 이름 쓰고 사인만 하면 돼.
나는 그렇게 내용이 채워진 계약서라는 것을 봤지만 내용을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글은 다행히 한국어였지만 대학교를 졸업한 나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변적인 내용이었다.
아니, 왜 저와 계약을 한다는 거죠? 계약이란 제가 어떤 일을 당신과 약속한다는 것인데, 제가 당신이 속해있는 회사에 입사라도 한다는 건가요. 아니면 당신의 집을 제가 사는 건가요. 도대체 이게 뭐에요.
뭔 말이 그렇게 많아. 그냥 이름 쓰고 사인하라니까.
내용을 알아야 사인을 하죠.
내가 이 사람 저 사람 꿈속에 접근해봤지만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이야. 당신 처녀자리지? 그렇게 모든 일에 꼼꼼하고 까탈스럽고, 손해보지 않고 일에는 완벽주의적인. 하여간 피곤하게 하는데 뭐 있다니까. 그건 그렇고, 그거 우리 ‘조직’으로 들어오는 입회원서야. 입회원서라는 말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 굳이 그 종이의 성격을 말하자면 그것이라는 거지.
네? 입회원서요? 그럼 제가 당신처럼 형체도 없이 검은 ‘개체’가 된다는 말인가요? 제 몸은 죽어버리고?
나는 그 말을 마치고 황망한 마음이 들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검은 개체는 자신이 말해야 하는 약관에 대하여 줄줄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래, 어떤 면으로 보면 그렇지. 하지만 이 세상에 일어나는 현상 가운데 오로지 나쁜 면만 가진 현상은 없다고. 이것이 그렇게 나쁜 현상이라고도 할 수 없겠지만. 어쨌든 이 종이에 사인만 한다면 너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되는 거야. 자신이 생각한 모든 것이 실현되고,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도 있지. 이대로 너를 덮고 있는 몸을 그대로 벗어버리고 벗겨진 네 영혼이 나와 함께 내가 부유하고 있는 곳으로 가게 될 거고 그렇게 되면 그때부터는 모든 것이 네 자유지.
말한 대로 내 몸의 꺼풀을 허물 벗듯이 벗게 된다면 그것은 죽음과 같지 않나요. 어찌하여 죽음이 아무 것도 아닌 거죠? 죽으면 제가 그렇게 갖고 싶은 직장이나 여자친구가 아무런 의미 없어지는 것 아닌가요. 당신이 그렇게 경시하는 꺼풀이라는 것이 없으면, 이 세상에서의 삶은 누가 보장하나요. 저 또한 애꿎은 사람들의 꿈속에 불청객으로 등장해서 그들과 조우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무슨 일이든 알고, 할 수 있으면 그게 무슨 의미인가요. 이미 난 이 사회에 발붙이고 살아갈 수가 없는 거잖아요.
그건 네가 오해하고 있는 거야, 라며 말을 듣지 않는 사춘기 중학생을 다그치듯 검은 개체는 다시 말을 이었다. 꼭 이 옷을 걸치지 않아도 된다고. 검은 개체는 자신을 둘러치고 있는 조명 같은 검은 공간을 옷이라 명명하며 말했다.
네가 원하는 형태, 네가 원하는 모습으로 주민등록증을 말소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거야. 하지만 단 한 번 처음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 지역으로 이동할 때 한 번 유체 이탈만 하면 된다고. 네 꺼풀이 조금이라도 부패해지기 전까지만 네가 돌아오면 되는데, 우리는 시간을 제어할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정말 나에게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고. 곧 너도 그 능력을 갖게 되겠지만.
하하, 왜 제가 그런 능력을 무작정 원한다고 생각하셨나요. 전 지금 잠시 혼란 속에 빠져있지만 제 몸을 버릴 정도로 혼란에 빠져있는 것은 아니에요. 당신에게는 이 몸이 그저 꺼풀에 지날지 몰라도, 제게 남은 인생은, 희망은, 사랑은 어쩌실 건데요.
꺼풀은 네 형식에 지나지 않아.
아니오, 많은 사람들이 형식보다는 내용이 중요하다고 하잖아요. 외모보다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하지만 마음에 외모가 없다면? 당신처럼 귀신이 되면 인생을 살 수도 없고, 인간들을 괴롭힐 뿐인걸요.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당신이 둘러치고 있는 검은 배경은 당신 몸이 아니잖아요. 무엇이라 규정할 수 없는 그냥 검은 천 같은 배경일 뿐. 당신이 말하는 이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타인에 대한 첫인상을 대부분 겉모습에 따라 결정하잖아요. 그 모습에 조그만 다래끼가 나더라도 사람들은 금세 놀라는데, 전 그렇게 허무하게, 이깟 입회원서 한 장에 제 인생을 마무리하고 싶지 않아요. 전 이만 가봐야겠어요.
난 이 말을 마지막으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다급한 발걸음으로 커피숍을 나오려고 한 순간 검은 개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문을 나선 순간 나는 무언가 알 수 없는 심연의 나락으로 빠지고 있었다. 검은 개체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이 말은 똑똑하게 들렸다.
다른 선택은 없다고. 나가는 길은 없어. 넌 어차피 이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고.
그 순간 잠에서 깨어났다. 두 번째 악몽. 꿈에서 본 이미지와 검은 개체의 목소리가 선명했다. 어렸을 때부터 어딘가에서 끝이 없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꿈을 많이 꾸었지만, 어른이 되어서 이런 꿈은 처음이었다.
밖은 춘천의 고목의 그림자가 이미 역 전체를 뒤덮어버릴 정도로 어둠이 짙게 깔려있었다. 내 시야 뒤쪽에는 ‘남춘천역’이라는 표지가 선명하게 밝혀있었다. 나는 역이 멀지 않은 벤치에서 잠이 들었고, 잠든 시간에 펼쳐진 세상은 무서운 것이었다. 나는 절로 몸이 떨렸고 핸드폰으로 친한 친구 아무나에게 방금 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잔뜩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친구는 모두 바쁘고, 갑자기 연락을 왜 했는지에 대한 반가움보다 어리둥절함이 더 클 것 같았다.
손도, 발도, 몸통도, 얼굴도 지극히 정상적이다. 꿈속의 검은 개체는 다른 선택은 없다고 했지만, 현실적으로 나는 죽지 않았다. 더불어 난 검은 개체가 알려준 지침대로 자살을 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나는 왜 이런 헛소리를 하는 검은 개체를 흠씬 패주지 못하였을까. 나는 왜 꿈속에서 잘못된 시간 속에 홀로 남겨져 이런 고초를 당해야만 했을까. 말도 안 되는 꿈의 끝은 허무하다. 난 왜 공상과학만화와 스릴러를 좋아했던 것일까. 그렇지만 난 이 둘이 만났을 때 무섭지만 허무한 결론이 나리라는 것을 짐작하지 못했다.
벤치에서 일어나 길가를 걸었다. 어두웠던 벤치와는 대조적으로 길가는 네온사인으로 휘황찬란했다. 꿈속은 허무했지만, 현실 세계도 허무했다. 난 유일하게 삶에서 안도하고 있던 부분인 직장을 단숨에 잃었다. 다소 억울한 부분도 있었지만, 전 직장을 무책임하게 퇴사한 내 잘못이 더 크다는 것을 난 재판장처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난 당장 내일부터 취업 커뮤니티에 가입해 이런저런 활동을 재개해야 하는 건가. 부모님께는 어떻게 말씀드려야 긴장 상태를 최소화할 수 있을까. 이참에 자취를 그만두고 부모님 댁으로 다시 들어가 부모님의 일을 도우면서 살아야 할까. 취업수당을 신청한 몇 개월간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아야 하는가. 전 직장에 사정을 이야기하고 백기를 들어야 하는가. 나는 인생에 대한 설익은 철학으로 소모적인 고민을 늘어놓기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효과적인 방안을 고민했다.
그리고는 남춘천에서 하루를 묵겠다는 당초 계획을 수정하고 서울로 가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뭐라도 행동하지 않으면 결론은 나지 않는다. 굳건한 마음을 담고 있는 내 몸을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 난 인파 속으로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