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 랜도

[습작]즉흥 12-1(사랑의 시작) 중 일부.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6. 24. 14:28

'사랑의 시작' 中 혜영의 속마음 일부.

 

 

1.

  내가 어렸을 때 담임선생님께서는 하루에 한자(漢字) 두 자를 신습한자라고 알려주시고 매일 한 자당 백 번씩 한자노트에 써오라는 숙제를 내주셨어. 나는 정말 하기 싫었지만 당구 큐대로 손바닥을 맞는 게 싫어서 나는 꾸역꾸역 숙제를 해오곤 했지.

  그런데 내가 스무 살이 지나고 대학생이 되고 나니까, 나에게 많은 것들이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무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로 다가오게 되었어. 선생님이라는 존재 자체가 내가 선택한 대로 수면에 떠오를 수도 있고, 가라앉을 수도 있는 상황. 무슨 수업을 들을지, 어떤 전공을 선택해야 하는지, 어떤 친구를 사귈지. 그러다 내 친구들은 캠퍼스 커플이란 바람에 하나 둘 편승하기 시작했어. 같은 수업을 들으면서 옆자리에 앉아 서로를 챙기고, 밥도 같이 먹고 수업이 끝나면 집에 바래다주고. 이런 소소한 행복의 비명을 옆에서 들으면서 나도 그 바람에 동참하고 싶었던 거야.

  텔레비전에서는 연인의 달콤함을 내세우는 연애 버라이어티 쇼도, 드라마도 나오곤 해. 온종일 내 연인이 없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내 마음을 도리질치지. 모두가 나를 보고 말하는 거 같아. 너는 아직 그 좋은 연인 하나 옆에 안 끼고 뭐하는 거냐고. 아직도.

  그런데 정말 연인이라는 게 의무적인 것은 아니잖아. 대학생활에 있어서 수많은 선택 가운데 하나일 뿐. 내게는 달려가야 할 꿈도 있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데 그 시간을 모조리 연인이라 부르는 사람에게 주는 것은 아직 싫어. 그 시간을 주었는데, 내 영글지도 못한 마음을 주었는데 그 남자가 내 시간, 내 마음 귀한 줄도 모른다면 억울할 거 같아. 게다가 나와 좋은 것 싫은 것 모두를 향유할 남자가, 내가 태양인 줄로 알았던 남자가 실은 형광등도 못 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할 거 같지 않니.

 

 

 

2.

  어느 날 난 포털 사이트에 우연한 만남이라는 단어를 검색했어. 단순한 단어의 조합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우연한 만남이라는 것에 영감을 얻었나봐. 우선 사이트에는 우연한 만남을 영작했고, 블로그에는 우연한 만남에 대한 소회(紹恢)가 적혀있고, 우연한 만남이라는 제목의 노래도 몇 곡 있었고, 우연한 만남이 들어간 질문과 답변들, 동영상, 논문, 책까지.

  그런데 내가 모든 만남은 우연한 만남이다는 명제를 내놓으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진짜 길 가다가, 버스 타다가, 일 때문에, 우연히, 말 그대로 우연하게 만나는 것은 물론이고, 소개팅이나, 약속이나 아니면 원래 알던 사람도 결국 그 처음을 타고 올라가다보면 우연히 만나는 거지. 처음을 생각해 봐. 내가 어떠어떠한 위치에 있었고,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을 만날 수 있었고, 내가 그 사람과 뭔가 이해관계가 있었거나 단순히 어떤 점이 잘 맞아서 지금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는 거지.

  그럼 가족은 어떠냐고? 가족도 그래. 한 여자와 한 남자가 처음에 우연히 만나서 정을 쌓아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우리는 태어나고. 할아버지 할머니라고 하는 사람들이 처음에우연히 만나지 않았다면 아버지나 어머니는 없었고, 부모님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우연히 만나지 않았다면 우리도 없는 거잖아.

  그럼, 모든 만남이 우연한 거니까 어차피 인생은 허무한 거라고? 필연은 없어서? 아니, 오히려 그 반대야. 모든 만남이 우연한 거니까, 우리는 아직 많은 기회가 있다는 거야. 우리는 저마다의 인생길을 걸으면서 - 그 길은 드넓은 신작로이든, 비포장도로든, 산이든, 모래사장이든, 들판이든, 어떤 길이든 말이지 - 한 걸음에 우연한 만남과 사람 하나씩, 또 한 걸음에 우연한 만남과 사람 또 하나씩. 이렇게 그물에 길어올린 우연한 만남과 그 결과로 맺어지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아직도 내가 걸어갈 길은 이렇게나 많은데. 우연에 우연에 우연을 거듭하면 필연이라 오해할 수 있는 우정도, 사랑도, 든든한 언니오빠도 더 많아지지 않겠어?

  오늘도 난 눈을 뜨며 다짐해. 내게 주어질 수많은 우연을 헛되이 날리지 말자고. 그 우연을 필연으로 착각할 정도로 우연이란 기회를 시의적절하게 활용하자고.

 

 

(* 12번 글 중 일부 수정. 근데 12번 글 전체를 어떻게 잘 수정하면 좋을까 ... )